요르단으로 탈출한 이영철 현대건설 이라크지사장 가족

  • 입력 2003년 3월 14일 19시 2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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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그다드에서 요르단 암만으로 피란 나온 이영철씨 가족. 왼쪽부터 이씨, 딸 풀레, 부인 아미르씨. -암만=권기태특파원
바그다드에서 요르단 암만으로 피란 나온 이영철씨 가족. 왼쪽부터 이씨, 딸 풀레, 부인 아미르씨. -암만=권기태특파원
“살던 집도, 몰던 차도 바그다드에 덩그러니 놔두고 가족들이 몸만 빠져나왔습니다. 이번에 미군이 공습을 시작하면 84년 이라크에 온 후 벌써 세 번째 겪는 전쟁이 됩니다. 눈을 감아도 잠이 오지 않습니다. 한 달 새 몸무게가 3㎏이나 빠졌더군요.”

현대건설 바그다드 지사장 이영철씨(54·아랍명 알리)의 말이다. 85년 이라크 여성과 결혼해 줄곧 바그다드에서 가정을 꾸며온 그는 지난달 인접국인 요르단의 암만으로 빠져나와 한 달째 ‘객지 생활’을 하고 있다.

이씨는 91년 걸프전 때는 폭발음과 사이렌, 비명으로 가득하던 바그다드에 남았다. 이라크 정부가 자국민 출국을 금지시키는 바람에 부인이 빠져나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부인 아말 모하메드 후세인 압둘 아미르(49)는 당시 네 살이던 딸 풀레(16)를 이씨의 품에 안겨주며 “둘만이라도 피란을 가라”며 울먹였다.

이번에는 이라크 정부가 출국자들을 가로막지 않아 이씨 가족은 지난달 중순 함께 나올 수 있었다.

그의 가족은 처음엔 호텔에 묵었지만 이라크 위기가 하루 이틀에 끝날 것 같지가 않아 최근 암만시내 옴 오데이나 지역에 방 한 칸을 빌렸다. 13일 집을 찾아가자 부인 아미르씨는 “점점 지쳐간다”고 하면서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관련 소식을 전하는 뉴스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딸 풀레양은 “일단 암만의 외국인학교로 전학했다”며 “같은 반에 나처럼 전학 온 이라크 친구가 넷이나 된다”며 쓸쓸한 표정을 지었다.이씨는 처가(妻家) 걱정도 크다. 장인과 막내 처제가 아직 바그다드에 남아 있다. 장모는 1월 장남이 살고 있는 말레이시아 콸라룸푸르로 옮겼다. 큰처남 외에 처가 형제는 모두 10명. 여객기 조종사, 증권사 직원 등 모두 전문직이어서 큰 어려움 없이 살고 있지만 대부분 덴마크 뉴질랜드 일본 두바이 시리아 등 외국에 흩어져 살고 있다. 이라크의 환경이 너무 좋지 않아서다. 이씨는 “형제들이 뿔뿔이 흩어져 살아도 장모는 10남매 모두 무사한 것만도 축복이라고 한다”고 말했다.

이씨는 공습 후 최단기간에 이라크로 들어가 바스라 키르쿠크 등지에 현대건설이 지은 시설물 37군데를 돌며 손상 여부를 점검하는 임무가 있다. 그는 “이라크인들 사이에 퍼져 있는 현대건설의 이미지는 ‘훌륭하다’는 것”이라며 “이번 위기를 잘 넘기고 80년대처럼 이라크에 ‘현대 전성시대’를 가져올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라며 간절한 표정이 됐다. “제 딸 이름 ‘풀레’는 이라크 산천에 흔한 하얀 꽃 이름이지요. 좋은 날이 어서 찾아와 딸과 티그리스 강변에서 풀레 꽃다발을 만들고 싶습니다.”

암만=권기태특파원 kk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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