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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2년 5월 28일 18시 4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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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은 학생 시절 육상선수였고 체육부장관 올림픽위원장 등을 지냈으며 지금도 축구를 비롯한 스포츠에 관심이 많은 것으로 안다. 축구 실력은 어느 정도인가.
“최근에는 축구 경기에서 뛰지 않았으나 학생 때 축구 포지션은 레프트, 라이트윙을 주로 맡아 많은 골을 넣기도 했다.”
-폴란드 대표팀의 세계적인 골 게터 올리사데베 선수는 나이지리아 출신이다. 그의 귀화에 직접 관여했다고 들었다. 외국 선수가 귀화해 국가대표로 뛰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나.
“올리사데베는 나이지리아에서 출생하였지만 오랫동안 폴란드에 거주했다. 폴란드 국적을 원했고 폴란드 여성과 결혼했다. 그의 귀화는 폴란드팀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가 폴란드와 많은 관계를 맺음으로 결정된 것이다. 현대는 누구나 국적을 선택할 권리가 있다. 많은 외국 출신들이 프랑스나 독일 대표팀에서 뛰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올리사데베는 최초의 외국출신 대표선수이나 마지막 외국출신 대표선수는 아닐 것이다.”
-폴란드와 한국 모두 이번이 6번째 월드컵 출전이다. 폴란드와 한국 축구팀의 전력을 비교해달라.
“한국 대표팀은 매우 강한 팀이다. 26일 프랑스와의 평가전에서 한국은 매우 좋은 경기를 펼쳤으며 강한 면모를 보여줬다. 실력이 매우 향상된 것 같았다. 한국팀의 강점은 개인기보다는 조직력에 치중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경기전망을 구체적으로 말해달라. 한국 감독이나 선수 중 아는 사람이 있다면….
“경기 결과에 대해서는 현재 나나 김 대통령이나 아무도 예상할 수 없다. 바로 이런 점이 스포츠의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거스 히딩크 감독은 유명한 네덜란드 출신 감독으로 유럽에서도 매우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선수 중에서는 이름은 모르겠지만 라이트윙을 맡은 박 선수(박지성으로 보임)가 폴란드에 매우 위험한 선수로 생각된다.”
크바시니에프스키 대통령은 월드컵 경기 외에도 폴란드 체제 전환 과정의 어려움과 대유럽관계, 한-폴란드 및 남북한 관계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해서 막힘 없이 답했다. 잘나가는 사회주의자였으나 체제 변화 이후에도 살아남아 대통령까지 오른 전력(前歷)이 말해주듯 그는 인터뷰 도중 한치의 흐트러짐이 없었으며 구사하는 어휘도 자로 잰 것처럼 정확했다.
▽폴란드의 체제변화
-중·동유럽 최대 국가인 폴란드는 구사회주의권 가운데 정치 경제적으로 가장 모범적인 성장을 하고 있다고 평가받는 나라다. 89년 사회주의 몰락 이후 폴란드에 어떤 변화가 있었으며 체제 전환 과정에서 무엇이 가장 어려웠나.
“폴란드는 1992∼2000년 연평균 5%가 넘는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을 보였다.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와 정정 안정을 이룩했다. 그 과정에서 민주제도와 정당, 정치적 복수주의, 법원의 중립화 등을 확립하는 것이 쉽지 않았으나 무엇보다 어려운 점은 국민의 사고방식을 바꾸는 일이었다. 자신의 운명을 자신이 홀로 개척해야 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인식시키는 것이 매우 어려웠다.”
-중·동유럽지역에 대한 외국인 투자의 절반가량이 폴란드에 이루어진 것으로 아는데 대폴란드 투자의 이점은 무엇인가.
“폴란드는 유럽대륙의 중심에 있는 지리적 위치와 큰 내수시장, 잘 훈련되고 상대적으로 값싼 노동력 등을 갖고 있다. 한국과 같은 비유럽지역 기업들은 폴란드에 투자함으로써 폴란드 내 생산제품을 쉽게 유럽연합(EU)시장으로 수출할 수 있다.”
-하루가 다르게 체제가 바뀌는 나라에서 젊은 나이에 두 번이나 대통령이 된 비결은….
“나는 젊지만 많은 정치적 경험을 쌓은 뒤 대통령에 당선됐다. 1985년에 이미 정부 각료로 일했으며 1990년 폴란드 사회민주당을 창당했다. 나는 신뢰할 만하고 실현 가능한 정책과 대안을 제시했다.”
-대통령께서는 과거 사회주의자였다가 사회주의 몰락 이후에도 승승장구했다. 과거 사회주의자였던 전력이 선거에 불리하지는 않았나.
“일부 유권자들은 그런 이유로 표를 던지지 않으려 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대선 때 내가 제시한 프로그램, 즉 경제발전과 사회안정,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EU 가입 등이 많은 유권자의 지지를 얻어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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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유럽관계
-대통령께서는 ‘역사에서 폴란드의 5분’이라는 용어를 사용, NATO와 EU 가입을 통해 안보와 경제발전을 이룰 수 있는 절호의 기회는 길지 않다고 국민을 설득, 99년 NATO 가입을 성사시켰다. 조지 W 부시 행정부 이후 미국의 일방주의로 ‘NATO 무용론’까지 나오는 상황에서 앞으로 NATO의 역할은….
“NATO는 중·동유럽과 발칸반도의 정치 안정에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이 지역에서 NATO 확대와 NATO-러시아 간 협력 강화는 매우 중요하며 절실하다. 폴란드는 NATO 회원국으로서 이 두 가지 방향을 적극 지지하고 있다.”
-최근 서유럽은 우파가, 중·동유럽은 좌파가 득세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또 유럽 내에서 최근 극우파가 약진하고 있는데 이를 어떻게 보나.
“서유럽에는 우파가, 중·동유럽에는 좌파가 득세하고 있다는 가정은 너무 일반화한 것으로 생각한다. 다만 인기만을 지향하는 폐쇄적이고 민족주의적이며 쇼비니즘(맹목적 애국주의)에 근거한 극우 단체에 대한 지지가 늘고 있는 것은 매우 우려된다. 이런 위험한 풍조와 맞서 싸우는 것은 모든 유럽인들의 사명이다. 이런 경향이 나타나게 된 근본 원인, 예를 들어 높은 실업률과 이민 증가, 유럽 통합과정이 본격화되면서 나타난 민족개념의 재정립에 따른 문제점 등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때다.”
▽한국-폴란드 관계
-한국과 폴란드 관계의 현황은? 김대중 대통령과는 어떤 얘기를 나눌 것인가.
“폴란드와 한국은 모두 뼈아픈 전쟁과 외세통치를 경험했으며 전쟁으로 파괴된 국가를 재건하기 위하여 엄청난 노력을 했다. 한국은 중국과 일본에 이어 아시아 제3의 교역 파트너이며 아시아 제1의 대폴란드 투자국이다(한국의 대폴란드 직접투자액은 약 16억달러). 나는 대우 문제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폴란드 진출이 감소되지 않기를 원한다.”
-폴란드 내에서 6만5000명의 고용효과를 가졌던 대우자동차가 파산한 것이 한국과 폴란드 사이에 가장 껄끄러운 문제 같다. 대우 문제에 대한 대통령의 생각과 바람직한 수습 방향은?
“대우의 상황 악화로 한국 경제의 이미지가 나빠지고 있다. 최근 양측 합작 관련자들은 보다 작은 회사를 설립하는 방향으로 의견을 모으고 있다. 이러한 새 회사 설립 계획을 한국 정부에서도 지지하기를 바란다.”
-폴란드는 남북이 모두 대사급 공관을 두고 있는 흔치 않은 나라다. 대통령께서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구체적 역할을 할 계획은 없는가.
“폴란드는 한국전 휴전 이후 중립국감독위원회에 참여해왔다. 나의 장인 역시 1955년 폴란드 장교로서 판문점에 근무한 바 있다. 폴란드의 중감위 참여는 한반도의 평화정착 과정이 남북한 평화협정의 체결로 계속 발전하는 것을 지지한다는 목적을 갖고 있다. 만일 폴란드가 남북한 통일과정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이 있다면 기꺼이 할 것이다.”
바르샤바〓박제균특파원 phark@donga.com
| 폴란드 개황 | |
| 면적 | 31만㎢(한반도 1.4배) |
| 인구 | 3845만명 |
| 언어 | 폴란드어 |
| 종교 | 가톨릭(95%) |
| 1인당 국민총생산 | 4271달러(2000년) |
| 정치체제 | 내각제(양원제)를 가미한 대통령제 |
| 최근 약사 | |
| 1989 | 자유총선, 최초의 비공산 정부 탄생 |
| 1990 | 바웬사 대통령 당선 |
| 1995 | 크바시니에프스키 민주좌파연합 당수 대통령 당선 |
| 1999 | NATO 가입 |
| 2000 | 크바시니에프스키 대통령 재선 |
| 2001 | 총선, 민주좌파연합 노동당 농민당 연정 탄생 |
▼크바시니에프스키 대통령은▼
알렉산데르 크바시니에프스키 폴란드 대통령은 1995년 41세의 나이로 폴란드 민주화 영웅인 레흐 바웬사 당시 대통령을 물리치고 대통령에 당선,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는 사회주의자 출신임에도 개혁적인 이미지를 부각시키며 세련된 화술과 용모로 바웬사 대통령에 실망한 폴란드 유권자를 사로잡았다. 5년 뒤인 2000년 대선에서는 정치 안정과 경제 성장이라는 두마리 토끼를 잡은 점을 인정받아 재선됐다.
그단스크 대학 학생회장을 지냈으며 23세 때인 77년 공산당 가입한 뒤 84년 당 기관지 ‘청년기치’ 편집국장을 지내는 등 구 사회주의 정권 아래서도 출세 가도를 달렸다. 공산당 정권이 폴란드 자유노조 출범으로 위기를 맞아 개혁적 인사를 발탁하는 과정에서 85년 31세의 나이로 청년부 장관에 올랐다.
89년에는 권력을 공산당에서 자유노조로 이양하는 원탁회의에 공산당측 협상대표로 참석한 뒤 90년 공산당이 해체되자 공산당을 계승한 폴란드 사민당을 창당, 당수가 됐다. 이어 사민당을 중심으로 결성된 민주좌파연합(SLD)을 이끌어 93년 총선에서 1당을 차지하면서 대통령감으로 부각됐다.
지난해에는 폴란드 내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제2차 세계대전 중 폴란드인의 유대인 학살을 사죄한 ‘예드바브네의 사과’로 전 유럽의 관심을 끌어 ‘국제형 지도자’라는 평가를 받았다.영어 러시아어에 유창한 만능 스포츠맨. 폴란드 한국 의원친선협회장을 지냈으며 폴란드 올림픽 조직위원장 자격으로 88년 서울올림픽에도 참석하는 등 이번이 세 번째 방한이다.
▼크바시니에프스키 대통령 약력▼
▽1954〓폴란드 서북부 비아오그라드 출생
▽1973〓그단스크대 경제학과
▽1977〓공산당 입당
▽1981〓학생 주간지 ‘ITD’ 편집장
▽1984〓공산당 기관지 ‘청년기치’ 편집국장
▽1985〓청년부장관
▽1988〓폴란드 올림픽조직위 위원장
▽1990〓공산당 해체, 폴란드 사민당 창당(당수)
▽1991〓하원의원 당선(최다 득표)
▽1995〓대통령 당선(51.7%, 바웬사 48.3%)
▽2000〓대통령 재선(53.9%)
*가족:부인 욜란다 여사와 딸 알렉산드라(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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