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왕, 사람보다 말 다루는데 능숙”

  • 입력 2002년 2월 7일 18시 07분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75)의 여왕 즉위 50주년을 맞이한 6일. 영국 전역에는 축하 종소리가 울려 퍼졌고 하이드파크와 런던타워에서는 축포가 발사됐다. 여왕은 겨울 휴양지인 샌드링엄궁에서 바로 50년 전 이날 임종한 선친 조지 6세의 애도 예배에 참석하는 것으로 일과를 시작했다.

즉위 50주년 기념일(Golden Jubilee)은 1000년 영국 왕실의 역사상 5번밖에 없었던 국가적 대 경사. 그러나 이날 영국민들의 모습에서 흥분과 열기를 찾아보기는 어려웠다고 워싱턴포스트는 전했다. 영국 언론들도 가라앉은 축제분위기에 영국왕실이 ‘당혹(in a panic)’하고 있다고 전했다.

1977년의 즉위 25주년 기념일(Silver Jubilee) 때와는 판이한 분위기다. 25년 전 이날 영국민들은 거리로 나와 국기를 흔들며 열정적으로 축제를 즐겼다. 당시 새로 문을 연 학교, 병원들은 앞다퉈 ‘주빌리(Jubilee)’라는 이름을 붙일 정도였다. 하지만 올해는 민간 단체나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주최하는 기념 행사나 파티 등이 없다시피 해 왕실 책임자 피터 레바인 경이 사임하는 일까지 있었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로 워싱턴포스트가 인용한 것이 데일리텔레그래프의 보도내용이다. 일간지 중 영국왕실에 가장 ‘충직’하다는 텔레그래프가 “사람들을 다루는 것보다 말을 다루는 데 더 능숙하다”고 여왕을 꼬집었다는 것.

진보적 성향의 일간지 가디언의 칼럼리스트 조너선 프리랜드는 “왜 오늘날까지 영국인들은 ‘우리를 …지배하도록/하느님, 여왕을 보호하소서’라는 국가를 불러야 하느냐”며 의문을 제기했다.

국민도 영국정부가 발행하는 여권 등 각종 공문서에 자신들이 ‘시민(citizen)’ 대신 ‘신민(subject)’으로 표기되는 것과 같은 영국 군주제의 유산에 반감을 갖기 시작했다고 워싱턴포스트는 전했다.

물론 엘리자베스 2세가 며느리였던 고 다이애나 황태자비에게 냉혹했으며 그가 죽은 뒤에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아 다이애너비를 사랑한 영국민으로부터 미움을 산 것도 냉담한 분위기의 한 원인으로 거론되고 있다.

그러나 워싱턴포스트는 영국 사회에 민주주의가 깊게 뿌리내려 군주제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이 낮아진 데에 근본 이유가 있다고 지적했다. “출신이 아닌 실력으로 사회적 신분을 획득할 수 있어야 한다는 평등 의식이 확산되고 있다”는 것.

즉위 50주년은 이제 “직장에 나가지 않아도 되는 국가공휴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날로 여겨지고 있다”고 정치학자 엔서니 킹은 말했다.

김정안기자 cred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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