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빈부격차 현장르포]7% 부유층이 국토90% 소유

  • 입력 2001년 5월 15일 18시 45분


필리핀 총선 다음날인 15일 메트로 마닐라의 극빈층 마을 가운데 하나인 앙고노 지역을 찾았다. 쓰레기가 둥둥 떠다니는 파식 강변에 기둥을 세우고 위에 합판과 야자수잎으로 집을 엮은 수상(水上)마을.

마을 근처에 들어서자 맨발에 윗옷도 입지 않은 아이들이 자전거를 타고 열심히 물통을 나르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이곳에는 대부분의 마닐라 내 극빈 지역과 마찬가지로 수도가 없기 때문에 식수를 다른 지역에서 길러 와야 한다. 물론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다.

다음엔 메트로 마닐라 내 마카티시의 부유층 지역인 다스 마리냐스 빌리지를 방문했다. 입구를 막아서는 빌리지 경비원에게 사정을 하고 신분증까지 맡기고서야 간신히 들어갈 수 있었다.

이곳은 마치 미국의 부촌인 베벌리힐스를 방불케 할 정도로 고급 주택들이 즐비했다. 집집마다 수영장과 테니스장을 갖추고 있고 일부 주택에는 헬기 착륙장까지 있었다. 메트로 마닐라 내에는 이같은 부유층 빌리지가 20여개나 있다.

상위 7%의 부유층이 전체 국토의 90%를 소유하고 있다는 필리핀의 빈부 격차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다.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필리핀의 빈민층은 대략 전체 인구의 85% 이상을 차지한다. 이 가운데 절반 가량은 최소한의 생계비로 그날 그날을 연명하는 극빈층에 해당한다.

거리에 나붙은 선거포스터를 떼고 있던 청소부 달리아 쿠르스(56·여)는 전날 선거에서 누구를 찍었느냐는 질문에 “근무가 있는 날이어서 투표장에 가 보지도 못했다”고 말했다. 쿠르스씨가 일당 120페소(약 3000원)를 벌지 않으면 식구 3명이 굶을 수밖에 없다는 것.

필리핀의 빈민층은 정치, 경제적으로 뿐만 아니라 정보에서도 소외돼 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TV를 시청할 수 없는데다 교육 수준이 낮아 신문도 제대로 볼 수 없다.

조지프 에스트라다 전 대통령을 지지한다는 안토니오 나발레스(30·노동자)는 에스트라다 전 대통령이 나흘 전 수감중이던 경찰청사를 떠나 군 병원에 입원한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이달 초 발생한 빈민층의 유혈 시위가 조지프 에스트라다 전 대통령이 구속된 지 4, 5일이 지나서야 벌어진 것도 이들이 에스트라다 전대통령의 구속 소식을 나중에야 접했기 때문이다.

현재 필리핀은 한국으로 치면 중학교까지 무상 교육을 실시하지만 생계를 위해 일을 해야하는 빈민층의 자녀는 거의 학교를 다니지 못한다. 수업을 위해 집에 있는 의자를 학교에 가져가야 할 정도로 교육 시설도 미비하다.

아시아에서 민주주의 역사가 가장 오래된 필리핀의 정치가 성숙하지 못한 것도 바로 이같은 사회적 모순 때문이다. 이 나라에는 정치 발전을 이끌 중산층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조지프 에스트라다 전 대통령에 대한 가난한 이들의 인기는 대단했다.

취재 도중 만난 빈민층의 거의 대부분은 ‘에랍(에스트라다 전대통령의 애칭)’을 지지한다고 말했다. 왜 그를 지지하느냐는 질문에 논리적으로 답변하진 못했지만 대부분 “그냥 좋다”고 대답했다.

필리핀의 지식층이 1일 발생한 빈민층 봉기를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 부패한 정치 세력의 선동에 의한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은 빈민층의 정치의식이 이처럼 미약하기 때문이다.

국립 필리핀대 레술레 바우존교수(역사학)는 “강력한 정부가 등장해 토지개혁을 포함한 사회 개혁을 실시해 부의 공평한 분배와 교육의 평등을 실현하지 못하면 필리핀의 정치 발전은 요원할 것”이라고 비판했다.

sungchu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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