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19세기 교황 비오오9세 시복 논란

  • 입력 2000년 8월 31일 18시 32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3일 비오 9세와 요한 23세 등 2명의 전임 교황에 대한 합동 시복식을 거행한다.

요한 23세에게 성인의 전단계인 복자 품위를 수여하는데 대해서는 이견이 없으나 비오 9세에 대해서는 그를 반유태주의자이자 반계몽주의자로 비난하고 있는 역사학자와 비평가들의 반발을 사고 있다.

역대 교황 중 최장인 31년여 간 재임한 뒤 1878년 타계한 비오 9세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사부아 왕 빅토르 에마뉴엘 2세가 이탈리아를 통일한 1870년 이탈리아 중부에 있던 가톨릭 교회의 세속적인 제국의 몰락과 로마의 상실을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초기에는 자유주의자로 분류되기도 했던 그는 1849년 공화주의자 폭도들에게 ‘영원의 도시’ 로마를 거의 내주고 도망쳐 나온 뒤로 반동주의적인 경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비오 9세는 유대인을 자신이 1850년 담장을 쌓아 만든 집단거주구역에 몰아넣었을 뿐 아니라 성직자들에게 유대인 어린이를 부모에게서 빼앗아 비밀 세례를 통해 가톨릭 교도로 만들도록 권장하기도 했다.

권위있는 진보주의 가톨릭 잡지인 ‘콘실리움’의 신학자들은 6월 교황 앞으로 보낸 한 탄원서에서 비오 9세는 “절대주의와 가부장적 교회 체제를 강화했다”고 주장하면서 복자 품위 수여 계획의 철회를 요청했다. 이탈리아와 미국 내 유대인 지도자들은 비오 9세가 유대인을 멸시해 왔다면서 반대하고 있다.

그러나 교계 보수세력과 이탈리아의 줄리오 안드레오티 전총리가 이끄는 해방주의 그룹에서는 비오 9세에 대한 교황의 결정에 이의를 달지 않고 있다.

비오 9세는 1864년 사회주의, 자유주의, 공산주의, 합리주의, 진보주의, 근대 문명 등 80개 항목을 이단으로 규정한 악명높은 ‘교서 요목’을 발표했다. 또 정교 분리, 법앞의 종교 평등, 국민 주권 등을 비판했다. 비오 9세는 1869년 제1회 바티칸공의회를 열고 교황의 무류 교의와 성모 마리아의 무원죄 잉태에 대해 추기경들의 승인을 받기도 했다.

<송평인기자>pi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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