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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1998년 9월 11일 07시 3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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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1980년대 미하일 고르바초프 옛소련 대통령이 개방과 개혁을 추진하면서 최측근으로 발탁돼 권력핵심부에 들어갔다. 고르바초프의 외교정책 특별보좌관으로서 91년 사담 후세인 이라크대통령과 만나 걸프전 종전을 위한 담판을 벌여 서방세계에 그 존재가 깊이 각인됐다.
김영삼(金泳三)전대통령이 민자당대표위원시절 모스크바에서 고르바초프 당시 대통령을 만나게 된 것도 그의 도움때문이었다.
한국과 외교관 맞추방사건이후 지난달 필리핀에서 있은 한―러외무장관회담에서 박정수(朴定洙)전외교통상장관과의 악수를 거부할 정도로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었다.
옛소련 붕괴 후 ‘고르바초프 사람들’이 모두 권력의 전면에서 사라졌지만 그만은 살아남아 96년 1월 외무장관으로 기용됐다. 어떤 정파에도 기울지 않는 ‘색깔없는 전문 관료’로 처신하면서 러시아의 위상정립과 서방세계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는 데 관심을 쏟아왔다.
서방국들은 그의 대외정책 스타일이 덜 개방적이기 때문에 늘 껄끄러운 상대로 여겨왔다. 또 그가 경제에 관한 전문성을 갖출 기회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최악의 경제위기에 처한 러시아를 구해낼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1929년 10월 키예프 출생. 53년 모스크바의 동양연구소를 졸업한 후 국영방송의 기자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으며 59년 공산당에 입당했고 88년 옛소련시절 최고회의(의회)에 진출했으며 정치국 후보위원까지 올랐다.
〈윤희상기자〉hees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