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국극복 지도자/드골]국민지지 「제왕의 카리스마」

  • 입력 1997년 12월 10일 20시 15분


샤를 드골은 헌법이 규정한 강력한 대통령의 권한을 기반으로 국민들과 직접 대화하는 형식으로 대통령직을 수행했다. 반면 정당이나 정치인 언론 등 대통령과 국민들 사이의 중재자들은 무시하는 성향을 보였다. 이때문에 그를 독재적 성향을 띤 반의회주의자로 평가하는 학자들도 있다. 그러나 드골의 2차대전과 알제리 사태의 해결능력은 카리스마적 권위에서 가능한 것이었고 그같은 카리스마는 감히 선진국인 프랑스에서도 통했다. 그 자신은 이같은 카리스마에 대해 「역사적 합법성」이라고 표현했다. 프랑스 정치학자들은 드골을 민중에 기반을 둔 권력자로 구분한다. 이런 점에서 같은 군인 출신인 나폴레옹과 비교되기도 한다. 그와 반대입장에 섰다가 후에 대통령에 당선된 프랑수아 미테랑은 「영원한쿠데타」라는 저서에서 드골의 정권 획득과정을 「완전한 쿠데타」로 규정했다. 58년 알제리 사태를 계기로 헌법을 개정해 4공화국을 무너뜨리고 대통령에 당선되는 과정과 65년 국민투표를 통해 간선제이던 대통령 선출방식을 직선제로 바꾸어 재집권하는 과정이 모두 쿠데타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드골의 「제왕(帝王)적 대통령론」은 그가 군인출신인데다 몰락한 귀족 가문출신이라는 데서도 연유한 것으로 보인다. 강력한 대통령을 고집한 또 하나의 이유는 그가 기본적으로 2차대전으로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는 점이다. 그는 연합국의 도움으로 해방을 맞은데 대해 자존심이 상해 「위대한 프랑스」를 주창했으며 이를 위해서는 대통령이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독자적 핵실험(60년), 서방세계 최초의 중국승인(63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탈퇴(66년) 등으로 상징되는 그의 독자외교는 모두 미소(美蘇)중심의 냉전체제로 고착돼가는 국제사회에서 프랑스의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한 것들이었으며 오늘날까지 프랑스 외교의 중심축으로 남아있다. 〈파리〓김상영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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