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사기신고 1초만에 은행 공유… 韓, 법원-국세청 빠져 ‘반쪽’[히어로콘텐츠/히든④-下]
동아일보
입력 2026-06-25 04:302026년 6월 25일 04시 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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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든: 검은돈의 혈관, 대포통장
<4·끝> 금융범죄 꼬리 말고 몸통 겨눠라
수사 ‘칸막이’ 없앤 호주-싱가포르
호주 ‘대포통장 블랙리스트’ 전파해
석달간 사기전화-문자 1.5억건 차단
싱가포르, 경찰-은행원 한곳서 협업
1년간 사기 피해 6900억원 막아
韓, 정보 칸막이에 통장 동결도 허술
“내가 원하던 삶을 되찾았어요.”
호주 퀸즐랜드주에 사는 리키 씨는 투자 사기로 날릴 뻔한 3억1000만 원 상당의 돈을 극적으로 되찾은 뒤 이렇게 말했다. 2024년 그는 온라인에서 찾은 가짜 투자회사에 속아 돈을 보냈다. 그러나 해당 통장이 과거 사기에 쓰인 적이 있다는 기록이 은행 간 시스템에 남아 있었다. 송금을 받은 웨스트팩 은행의 이상 거래 탐지 시스템은 곧바로 24시간 동안 거래를 중지했다. 범죄 조직이 돈을 빼내기 전, 피해금은 전액 리키 씨에게 돌아갔다.
싱가포르 경찰청 내부의 사기방지사령부(ASCom) 모습. 이곳에선 경찰과 싱가포르 주요 은행인 DBS 등 현지 은행 관계자들이 함께 근무하고 사기 계좌 관련 정보를 공유하며 사기 피해를 막고 있다. 싱가포르경찰청 제공
대포통장의 숨통을 끊는 무기는 바로 이런 ‘정보의 연결’이다. 보이스피싱이나 리딩방 사기의 단서는 경찰, 은행, 통신사에 파편처럼 흩어져 있다. 호주와 싱가포르는 부처와 민관 사이의 칸막이를 허물어 성과를 냈다. 반면 한국은 은행과 수사기관 등이 참여해 의심 통장 정보를 나누는 공유망 ‘ASAP’를 지난해 10월 가동하고도 핵심 정보는 연결하지 못했다. 유령 회사의 숨통을 쥔 국세청이나 등기소, 금융정보분석원(FIU) 등은 보이스피싱과 관련이 작아 보인다는 이유로 공유 범위에서 빠져 있기 때문이다. 대포통장의 몸통인 유령 회사를 잡을 정보가 여전히 칸막이에 갇혀 있는 것이다.
● 블랙리스트, 전국 은행에 동시에 꽂혀
리키 씨가 재산을 지킨 건, 호주에선 한 은행에서만 대포통장이 적발돼도 곧바로 전국 모든 은행과 통신사의 블랙리스트에 오르기 때문이다. 호주 국가사기방지센터(NASC)가 참여하는 금융 범죄 정보 공유망(AFCX)에는 정부뿐 아니라 은행과 통신사, 플랫폼 기업이 참여한다. 어느 한 곳에 사기 신고가 들어오면 의심 통장과 전화번호가 참여 기관 전체에 1초 만에 공유된다. 고위험 거래에 대해 사전 경고뿐 아니라 직접 통화를 차단하고 거래를 보류시키는 적극적 조치까지 가능하다. 호주 정부는 이 정보망을 무기 삼아 지난해 4분기(10~12월)에만 사기 전화 1억990만 건과 문자메시지 4110만 건을 차단했다. 같은 회사가 여러 은행에 대포통장을 개설하는 ‘꼼수’를 부려도 걸러낼 수 있다.
NASC는 상근 인력 31명 외에도 각종 신종 사기 대응법을 연구하는 민관 합동 조직 ‘퓨전 셀’도 운영한다. 경찰과 은행, 통신사의 실무자와 각 분야 교수 등 전문가가 한자리에 모여 전문 지식까지 나누는 것이다. NASC를 이끄는 호주 경쟁소비자위원회(ACCC) 공보 담당자 로지 자츨러 씨는 “여러 기관과 산업이 복잡하게 얽힌 신종 사기에 대응하려면 민관이 힘을 합쳐야 한다”고 설명했다.
싱가포르는 한발 더 나아가 물리적 장벽도 없앴다. 2022년 싱가포르 경찰청 내부에 신설된 사기방지사령부(ASCom)에는 경찰과 6개 주요 시중은행 직원이 한 사무실에 모여 나란히 일한다. 이런 공조로 싱가포르 경찰은 2024년 한 해 약 1900억 원에 해당하는 사기 피해금을 회수했다. 또 약 5000억 원 규모의 추가 피해를 사전에 막았다.
● 韓, 알맹이 빠진 ‘반쪽짜리 통합’
2024년 6월 스티브 존스 당시 호주 금융서비스부 장관(오른쪽 첫 번째)이 국가사기방지센터(NASC)의 성과 등을 알리는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호주은행연합회 제공한국도 움직이고 있다. 8월부터 개정 통신사기피해환급법이 시행되면 당사자의 동의 없이도 은행과 통신사, 수사기관이 보이스피싱 예방 목적으로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게 된다. 기존엔 일부 은행권 안에서만 정보가 돌아, 금융감독원이나 수사기관과 양방향으로 공조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여전히 한계가 적지 않다고 지적한다. 첫째, 가장 중요한 정보가 빠졌다. 유령 회사 정보를 쥔 국세청과 등기소가 ASAP에 들어가 있지 않다. 대포통장의 몸통을 식별할 핵심 퍼즐이 없으니 수사기관은 매번 꼬리(개별 통장)만 쫓는다. 한 통장으로 수많은 가상계좌를 발급해 줄 수 있는 결제 대행사나 가상자산 사업자 등 범죄 자금이 흘러가는 우회로 역시 감시망 밖에 방치되어 있다. 반면 영국은 국세청, 기업청은 물론이고 도박업체까지 무려 200여 개 기관을 하나의 정보망으로 촘촘히 엮어 범죄의 퇴로를 막았다.
둘째, 감시 범위가 좁다. ASAP는 현재 진행 중인 보이스피싱과 관련한 자금세탁에만 초점을 둔다. 금융위원회 금융안전과 관계자는 “과거 이력을 오래 쌓아 두면 개인정보 문제가 있어, 발생한 사건 정보를 중심으로 운영할 예정”이라고 했다. 하지만 누적된 정보를 활용하지 않으면 대포통장을 누가 발급하고 어디서 사용하는지 패턴을 잡아내기 어렵다.
셋째, 수사기관과 은행의 공조가 부족하다. 지난해 출범한 전기통신금융사기 통합대응단의 인력은 사실상 경찰 중심이다. 은행 직원은 한 명도 없다. 경찰과 주요 은행이 한자리에서 일하는 싱가포르와 대비된다. 통합대응단 관계자는 “아직 기관 간 정책 협력 수준에 머물러 있고, 실시간 공동 대응하는 구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설명했다. 은행이 포착한 의심 통장을 수사기관이 곧바로 받아 조치하는 직접 연결 고리가 없으면, 한발 늦은 대응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 ‘단서 한 줄’에 막힌 신종 사기 피해자 보호
제도의 사각지대도 넓다. 사기 피해가 신고되면 입금에 쓰인 통장을 즉각 동결시키는 제도는 한국이 2011년 도입해 호주나 싱가포르보다 일찍 시행했다. 하지만 15년이 지난 지금껏 보이스피싱에만 적용하고 있다. 리딩방 사기와 같은 신종 범죄의 피해금은 즉각 동결시킬 수 없다. 이를 넓히는 통신사기피해환급법 개정안은 국회에 계류 중이다.
이는 해당 법 2조의 단서, ‘재화나 용역의 제공을 가장한 경우는 제외한다’는 한 줄 때문이다. 단순 협박이나 대출 권유는 보이스피싱으로 보고 통장을 동결할 수 있지만, 대가를 약속하는 투자 사기나 로맨스 스캠의 피해자는 이 조항 탓에 보호받지 못한다. 서준배 경찰대 행정학과 교수는 “이런 단서를 둔 나라는 우리밖에 없다”고 했다. 무분별한 신고로 인한 부작용이 우려되면 통장 동결 조치를 72시간으로 제한하거나 싱가포르처럼 허위 신고를 무겁게 처벌하면 된다는 얘기다.
통장 동결 제도의 사각지대는 사법 체계에도 있다. 사기 피해자가 대포통장 주인들로부터 ‘돈을 줄 이유가 없다’며 소송을 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 통장 주인이 보이스피싱에 가담했다는 사실은 피해자가 입증해야 한다. 법에 익숙지 않은 피해자가 홀로 맞서다 보니, 소송을 당한 피해자가 10건 중 9건꼴로 진다. 반면 영국은 수사기관이 중심이 돼 법원에서 자금 흐름을 다툰다. 한국도 사기 신고가 반복된 통장이라면, 피해자가 아니라 통장 주인이 ‘정상 거래’임을 직접 입증하도록 구조를 뒤집자는 제언이 나온다.
투자 사기를 당해 유령 회사 ‘대한퍼스트’의 대포통장으로 5000만 원을 잃은 배관공 양재호(가명·52) 씨가 자신의 송금 내역 중 하나를 보고 있다. 그는 사건 발생 약 2년 6개월이 지나도록 잃은 돈을 되찾지 못하고 있다.
동아일보는 창간 100주년을 맞아 2020년부터 히어로콘텐츠를 선보이고 있습니다. 이번 히어로콘텐츠팀의 ‘히든: 검은돈의 혈관, 대포통장’은 각종 범죄의 핵심 도구인 대포통장 문제를 조명했습니다.
〈히어로콘텐츠팀〉 ▽팀장: 황성호 기자 hsh0330@donga.com ▽취재: 임재혁 손준영 조승연 기자 ▽사진: 박형기 기자 ▽편집: 봉주연 기자 ▽그래픽: 김충민 기자 ▽인터랙티브 기획: 김재희 기자 ▽인터랙티브 개발: 임희래 ND ▽인터랙티브 디자인 및 영상: 정시은 C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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