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소설가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대표작 ‘향수’에 등장하는 가야르 부인은 안락한 노후 생활을 꿈꾸며 평생 고생해 집 한 채를 마련한다. 하지만 그 집을 처분하고 받은 돈이 ‘하이퍼 인플레이션’(통제 불능의 물가 상승)으로 휴지 조각이 돼 그녀의 노후 계획은 수포로 돌아간다.
비록 소설 속의 극단적인 상황이지만 이는 단일 자산에만 의존하는 노후 준비가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지금은 늘어난 기대 수명으로 은퇴 이후의 삶이 근로 기간만큼이나 길어졌다. 또한 단순히 자산을 축적하는 것을 넘어 소진 속도를 늦춰야 하는 복잡한 과제에 직면해 있기도 하다.
● 마켓 타이밍의 유혹과 초기 하락의 위험성
많은 투자자가 요즘 같은 상승장에서는 연금자산의 평가금액이 증가해 수익을 확정 짓고 싶은 욕구가 높아지고 자산의 매도 시점에 대한 고민도 많아졌다. 과연 은퇴를 앞두고 위험자산을 안전자산으로 전환하는 것이 맞을까. 혹은 시장이 고점인 것 같으니 주식 관련 자산을 전부 매도하는 것이 옳을까.
주식 투자의 경험이 있는 투자자라면 완벽한 마켓 타이밍을 맞추기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고점 매도, 저점 재매수는 가장 이상적이지만 자산 가격의 고점을 판단하는 것은 거의 신의 영역에 속한다. 섣불리 주식을 매도할 경우 연이은 시장의 상승을 놓칠 수 있으며 이는 장기적으로 자산 가치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
은퇴자들에게 진짜 무서운 적은 시장의 변동성 그 자체가 아니라 은퇴 초기에 겪는 시장의 하락이다. 이를 ‘수익률 순서의 위험(Sequence of Returns Risk)’이라고도 한다. 시장의 상승과 하락 국면을 완전히 무시할 수 없으며 실제로 은퇴 시기에 주식 시장이 어느 국면에 있느냐에 따라서 은퇴 자산의 소진 시점이 크게 달라진다는 의미다.
그 원인으로는 두 가지를 꼽을 수 있다. 첫 번째로 대다수의 투자자가 익히 알고 있듯이 연금자산을 주식에 투자했을 때 시장의 고점에서 퇴직하면 은퇴자금의 규모가 커진다는 점이다. 두 번째는 은퇴 시기 초반에 자산 가격이 하락할 때 자금을 인출하기 시작하면 시장이 반등하기 전 손실을 확정해 버리므로 손실을 회복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많은 은퇴자는 두 번째 원인을 간과하기 쉽지만 그 영향은 생각보다 크다.
가상의 주가지수와 그 지수에 투자한 투자자가 은퇴 첫해의 연금자산인 1억 원의 4%(400만 원)를 매년 인출한다고 가정했을 때 잔여 자산규모 추이를 보자. 주가지수의 누적 수익률은 동일하다는 가정하에 하나는 은퇴 첫해에 시장이 30% 하락하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은퇴 30년 차에 30% 하락하는 경우이다. 최종 잔여 자산은 은퇴 첫해에 시장이 30% 하락했을 때가 8700만 원 더 적다. 은퇴 초기에 자산 가격이 하락할 때 자금을 인출해 버리면 계좌의 원금이 줄어들어 나중에 시장이 반등하더라도 손실을 회복할 여력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이는 투자의 기간이 짧을수록 더 치명적이다.
● 유연한 인출 전략: 소나기는 피하고 간다
그렇다면 이러한 위험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해답은 약세장의 공포에 휩쓸려 자산을 매도하는 것이 아니라 인출 규모와 시점을 전술적으로 조정하는 것이다. 시장이 유의미하게 하락한 구간에서는 연금 자산의 인출 규모를 일시적으로 축소하는 것이 필요하다. 복리 효과 덕분에 인출 금액을 조금만 줄여도 노후 자산이 고갈되는 시점을 획기적으로 늦출 수 있다.
가능하다면 시장 약세기에는 출금을 아예 멈추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1960년대 후반 미국의 은퇴자들은 주식의 약세와 높은 인플레이션의 결합이라는 최악의 시기를 경험했는데 은퇴 초기 구간의 약세장에서 1967년, 1970년, 1974년, 1975년 중 한 해를 선택해 출금을 멈췄을 경우 1995년까지 잔여 연금자산을 상당 부분 보전할 수 있었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반대로 지금과 같이 주가가 상당기간 상승했을 때 2, 3년 치의 생활자금을 채권이나 안전자산으로 확보해 두는 것도 좋은 방안이 될 수 있다. 이렇게 하면 주식 시장이 하락했을 때 주식을 팔지 않고 안전자산에서 생활비를 충당하며 시장이 회복될 때까지 기다릴 수 있다.
미주리대의 연구에 따르면 은퇴 후 위험자산의 비중이 현저하게 낮을수록 은퇴자의 생존 기간 내 자금 소진의 가능성이 높았다. 특히 인플레이션율이 높을 때는 생전에 자금 부족에 시달릴 가능성이 높았다고 한다. 결국 위험을 무조건 피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 적절한 위험관리가 필수적이다. 무모한 투자는 피해야 하지만 약세장에서의 공포심 때문에 자산을 지키려다가 오히려 ‘황금 거위’를 죽이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시장의 변동성을 인정하고 유연한 출금 전략으로 대응하는 현명함이야말로 노후를 지키는 든든한 버팀목이 될 것이다.
신한프리미어 패스파인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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