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당구(PBA) ‘원조 퀸’ 이미래가 17일 경기 고양시 킨텍스 PBA 스타디움 보조경기장에서 큐를 양손에 나눠 든 채 미소 짓고 있다. 이미래는 10일 끝난 2025~2026시즌 프로당구 7차 투어 ‘국민의 행복쉼터 하이원리조트 챔피언십’ 대회 여자부 정상에 서며 1731일 만에 다시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고양=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어둡고 긴 터널에서 빠져나온 기분이었어요.”
다시 설 수 없을 것만 같았던 정상에 오른 순간 프로당구 ‘원조 퀸’ 이미래(29)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데도 눈물은 쉽게 멈추지 않았다. 경기 고양시 킨텍스 PBA 스타디움에서 최근 만난 이미래는 1731일 만에 우승을 확정한 순간을 떠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이미래는 10일 끝난 2025~2026시즌 프로당구 7차 투어 ‘국민의 행복쉼터 하이원리조트 챔피언십’ 여자부(LPBA) 결승에서 이우경(28·에스와이)을 4-3으로 꺾고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이미래는 프로 데뷔 직후부터 LPBA 간판스타로 떠올랐다. 프로당구 원년인 2019~2020시즌 메디힐 챔피언십 우승, 웰컴저축은행 웰뱅 챔피언십 준우승을 포함해 7차례 투어에서 다섯 차례 톱5에 이름을 올렸다. 2020~2021시즌에는 3~5차 대회에서 3회 연속 우승을 차지하는 등 프로당구 출범 이후 남녀부를 통틀어 처음으로 개인 통산 4승을 올렸다.
그러나 이 시즌을 끝으로 ‘암흑기’기가 시작됐다. 제 기량이 나오지 않았고 이렇다 할 반전의 계기도 찾지 못했다. ‘당구를 그만둘까’하는 생각이 수시로 마음을 흔들었다. 이미래는 “‘입스’(샷에 대한 불안 증세)가 찾아온 줄도 몰랐고 처음엔 이를 인정하기도 힘들었다”며 “2년가량은 경기장에 들어가는 것조차 너무 싫고 사람을 만나는 것도 꺼려질 정도로 정신이 무너졌었다. 정말 지옥 같은 마음이었다”고 전했다. 이 시기를 견디게 해준 최소한의 원칙이나 루틴을 묻는 말엔 ”그런 걸 지킬 여력도 없었다“고 답했다.
‘원조 퀸’ 이미래가 17일 경기 고양시 킨텍스 PBA 스타디움 보조경기장에서 샷을 하고 있다. 고양=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이번 시즌 초반만 해도 더 깊은 수렁에 빠지는 듯했다. 이미래는 2025~2026시즌 1~3차 대회에서 모두 본선 첫 경기 탈락의 아픔을 겪었다. 이미래는 “비시즌 기간 준비를 잘해서 자신감이 올라와 있었기 때문에 이번 시즌엔 우승할 수 있을 것이란 믿음을 갖고 시작했다. 그런데 세 대회 연속으로 64강에서 탈락하니 좌절감이 심했고 받아들이기 힘들었다”며 “3차 대회가 끝나자 ‘우승해도 기쁠까’하는 체념에 빠지기도 했다”고 했다.
이미래가 우승의 실마리를 찾은 건 ‘차세대 스타’ 정수빈(26)과의 8강 경기였다. 이미래는 이 경기에서 1, 2세트를 내주며 탈락 위기에 몰렸다. 당시 “요즘 (정)수빈이가 현재 애버리지 부문 3위(1.025)에 있을 만큼 굉장히 잘하고 있다는 걸 안다. 3세트를 앞두고는 목숨줄 내놓고 하는 ‘오징어 게임’을 하는 기분이 들었다”는 이미래는 3~5세트를 모두 이기고 ‘역스윕’에 성공하며 4강에 올랐다. 이미래는 “할 수 있다는 믿음을 끝까지 놓지 않았다. 결승도 어려웠지만, 이날 경기는 스스로가 대견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경기”라고 말했다.
어린 시절 이미래는 해보고 싶은 게 많은 꿈 많던 소녀였다. 유년 시절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해 화가를 꿈꾸기도 했고, 소질은 없다고 느꼈지만 미용사를 해보고 싶기도 했다. 무대 위에서 가수 유미의 ‘사랑은 언제나 목마르다’와 같은 애절한 발라드를 부르는 모습을 상상해 본 적도 있다. 바리스타 자격증을 따고 카페를 차리는 건 지금도 남몰래 간직하고 있는 꿈이다.
‘원조 퀸’ 이미래가 17일 경기 고양시 킨텍스 PBA 스타디움 보조경기장에서 큐에 초크를 문지르는 자세로 카메라 앞에 섰다. 고양=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그보다 당구는 하기 싫은 숙제에 가까웠다. 당구 마니아였던 아버지를 따라간 당구장에서 처음 큐를 잡고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본격적으로 당구를 시작했다. 이미래는 딸의 재능을 알아본 아버지의 뒷바라지 속에서 학업과 당구를 병행하는 일정을 소화했다.
그러나 당시 이미래는 큰 흥미를 느끼진 못했다고 한다. 그런 생활이 힘들어 매일 밤 울기도 했다. 이미래는 “사실 어릴 땐 당구가 미웠다”며 “그때 느꼈던 당구에 대한 반발심이 오래가더라. 내 인생에 당구를 향한 ‘운명적인 사랑’ 같은 건 없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런 이미래가 당구를 ‘숙명’으로 받아들인 건 자신을 끝까지 지켜준 팬들 덕분이다. 이미래는 “이번 우승 이후 ‘성적과 상관없이 항상 믿고 응원해 왔다’는 메시지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며 “조건 없이, 변함없이 저를 지켜봐 준 분들 덕분에 다시 버텨낼 힘을 얻었다”고 말했다. 이어 “그분들에게 이번 우승으로 조금이나마 기쁨을 드릴 수 있어 더 뜻깊다”라고 했다.
이미래는 29일 막을 올리는 LPBA 8차 투어 대회 하림 챔피언십에서 2개 대회 연속 정상에 도전한다. 이미래는 “아직 슬럼프가 끝났다고 장담할 수는 없겠지만 한결 홀가분한 마음으로 대회 치를 수 있을 것 같다”며 “한 게임 한 게임 승리에 집중하는 게 우선이다. 그러면 우승은 자연스럽게 따라 올 것”이라며 포부를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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