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무니’를 지우는 재개발?… 장소의 혼과 새 시대가치 모두 살릴 길[김대균의 건축의 미래]

  • 동아일보

생활방식과 지혜의 보고 ‘터무니’… 건축 기본은 장소성에 대한 이해
정쟁 탓에 종묘 장소성 훼손될라… ‘용적률 이양제’ 통해 상생안 내야
미래-과거 공존 재개발 이뤄져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서울 종묘 맞은편에 높이 145m 건물이 들어설 수 있도록 서울시가 최근 규제를 완화한 가운데 정치권 등을 중심으로 찬반 논쟁이 뜨겁다. 찬성 측은 낙후된 도심 개발을 위해 불가피하다는 입장이나 반대론자들은 고층 건물이 들어서면 종묘의 문화재적 가치가 훼손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사진은 종묘 정전(正殿)의 전경(위쪽)과 상공에서 바라본 종묘의 모습. 국가유산청·서울연구원 제공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서울 종묘 맞은편에 높이 145m 건물이 들어설 수 있도록 서울시가 최근 규제를 완화한 가운데 정치권 등을 중심으로 찬반 논쟁이 뜨겁다. 찬성 측은 낙후된 도심 개발을 위해 불가피하다는 입장이나 반대론자들은 고층 건물이 들어서면 종묘의 문화재적 가치가 훼손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사진은 종묘 정전(正殿)의 전경(위쪽)과 상공에서 바라본 종묘의 모습. 국가유산청·서울연구원 제공
《종묘 개발 논쟁으로 본 재개발

‘터무니없는 계획’은 정당한 근거가 없는 계획을 뜻한다. 그런데 ‘근거’ 대신 ‘터무니’라는 말을 쓰는 이유는 뭘까. 터무니는 어디서부터 유래된 것일까. 터무니는 장소를 의미하는 ‘터’와 모양이나 흔적을 뜻하는 ‘무늬’가 결합된 단어다. 오랜 세월 삶의 모습이 터에 남아 나무의 나이테처럼 축적된 흔적, 그것이 곧 터무니다. 터는 집을 짓고 농사를 짓고 공동체를 형성하는 등 인간의 모든 행위의 바탕이 된다. 그 때문에 생각이나 행동의 근거를 뜻하는 단어로 터무니를 쓴 것이다.》


김대균 건축가·착착스튜디오 대표
김대균 건축가·착착스튜디오 대표
영어 ‘take place’는 번역하면 ‘발생하다’라는 뜻이다. 장소(place)를 취하는(take) 것이 바로 어떤 사건이 발생했다고 보는 것이다. 이 표현은 장소가 인간 행위와 사건의 근원이자 바탕임을 다시 확인시켜 준다.

땅의 맥락인 ‘장소성’을 이해하는 것은 건축의 기본이다. 장소성은 지형이나 날씨와 같은 물리적 조건뿐 아니라 역사와 문화, 주변과의 관계 등 인문학적 요소까지 포함한다. 장소성을 읽어내는 데 중요한 것 중 하나가 바로 땅에 담긴 시간의 흔적, 즉 터무니를 찾는 일이다. 터무니는 오랜 생활 방식과 자연의 지혜가 담긴 삶의 보고다. 과거에 형성된 것이지만, 동시에 지금의 모습이기도 하다. 즉, 터무니는 과거가 아니라 연속성과 현재에 방점이 있다.

장소가 인간 행위의 근원이면서 동시에 정신적 바탕이 된다는 인식은 현대철학에서도 중요한 지점이다.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는 인간을 ‘현존재(Dasein)’라고 했다. ‘Da’는 ‘그곳(there)’을, ‘Sein’은 ‘존재(being)’를 뜻한다. 그는 장소를 인간의 존재 무대로 인식하고, 인간을 존재 사이의 존재로 정의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존재자가 존재하려면 가장 먼저 장소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처럼 동서양 모두 장소가 존재의 근원이라는 인식을 공유했다.

“10년 전의 나는 기억하는 것일까, 존재하는 것일까”라고 물으면 대부분 “기억하는 것”이라고 답할 것이다. 한 달 전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1분 전, 1초 전의 나는 기억하는 것일까, 존재하는 것일까”라고 물으면 이 질문은 시간과 존재, 기억을 둘러싼 철학적 사유로 넘어간다. 현재만 존재하고 과거는 단지 기억에 불과하다면 ‘나’라는 존재의 근거는 참으로 미미해진다. 과거의 장면 하나하나와 그 기억이 모여 지금의 나라는 존재의 정체성을 만든다. 유년의 학교와 집, 직장, 친구들과 뛰놀던 곳까지, 우리의 모든 기억에는 장소가 배경으로 깔려 있다. 과거는 끊임없이 현재에 영향을 미치고, 그 연속 위에서 미래가 형성된다. 인간 정체성의 바탕이 장소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서구사회에서 장소의 고유성을 말할 때 ‘장소의 혼(genius loci)’이라는 표현을 자주 쓴다. 땅에 생명의 혼이 깃들어 있다는 사고는 풍수를 통해 땅과 사람의 관계를 생명으로 대하는 우리의 태도와 유사하다. 모든 장소는 고유한 성격을 갖고, 그것은 고유한 지역의 건축물을 만들어 낸다. 그리스의 파르테논 신전이 그리스 정신을 상징한다면, 한국에서는 종묘가 그러한 역할을 한다.

종묘의 길고 낮은 수평적 건축은 땅에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그 땅을 지키는 모습을 형상화한다. 수평의 건축은 장소의 건축을 가장 극적으로 드러낸다. 수평성이 강조된 종묘는 ‘장소의 혼’을 결합한 건축인 것이다. 그런 종묘가 정쟁의 도구가 되어 장소성을 훼손하는 일로 이어지는 것은 용납될 수 없다. 종묘의 가치를 지키면서도 새로운 시대의 개발 가치를 창출하려면 상생의 지혜가 필요하다. 문화재 보호로 인해 법정 용적률을 온전히 사용할 수 없는 지역의 남은 용적률을 개발 가능 지역으로 이전할 수 있도록 하는 ‘용적률 이양제’는 이미 세계 여러 대도시에서 시행 중인 제도로, 이 문제를 해결할 하나의 해결책이 될 수 있다.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케데헌)가 세계적인 사랑을 받으면서 한국에 대한 외국인들의 관심이 어느 때보다 뜨겁다. 흥미로운 점은 이들이 매력을 느끼는 장소가 거대한 랜드마크 건축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북촌의 한옥골목, 동대문 낙산공원, 한강 다리, 남산 등 시간이 누적된 서울의 일상적 풍경이 세계인의 시선을 끌고 있다. 현재의 일상 속 모습에서 발견되는 전통 콘텐츠와 문화, 시대를 이어온 동네가 세계의 인정을 받는 한국의 가치인 것이다.

수백 년 땅에 새겨진 터무니를 손상하면서 최대 용적률만을 부동산 재개발의 유일한 목표로 생각하는 양적 건설 주도의 개발은 지난 40년간 충분히 반복돼 왔다. 앞으로의 개발은 터무니를 고려한 점진적 개발, 지속가능한 미래 모델, 커뮤니티와 교통을 기반으로 한 사용자 중심 개발, 역사 경관과 공간 콘텐츠를 결합한 개발 등 다양한 융합과 기술, 콘텐츠 개발 등을 통한 방향으로 새롭게 모색돼야 한다. 재개발은 이름만 미래와 공공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다. 터무니를 존중하면서 동시에 미래를 향하는 태도의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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