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진호 감독 “영화 ‘덕혜옹주’ 속 최고의 장면은…”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8월 8일 10시 52분


영화 ‘덕혜옹주’ 허진호 감독. 
서울 종로구 팔판동 카페에서. 이훈구 기자 ufo@donga.com
영화 ‘덕혜옹주’ 허진호 감독. 서울 종로구 팔판동 카페에서. 이훈구 기자 ufo@donga.com
구부정한 허리, 초점 없는 눈동자의 한 여인이 부축을 받으며 걸어 나온다. 백발의 상궁들은 그 앞에 엎드려 오열한다. “이제 오셨습니까! 아기씨.” 하지만 37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온 여인은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다.

2007년 방영된 KBS 다큐멘터리 ‘한국사 전(傳)’의 ‘덕혜옹주’ 편은 덕혜옹주가 1962년 귀국했을 당시의 자료 화면을 틀었다. 최근 만난 허진호 감독(53)은 “옹주가 공항에 도착했을 때 어릴 적 유모였던 할머니 상궁이 ‘아기씨’라고 부르며 우는데, 울림을 느꼈다”며 “영화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허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영화 ‘덕혜옹주’(3일 개봉)는 5일부터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하며 벌써 116만 명(7일까지 집계)의 관객을 모았다. 조선 고종의 고명딸인 덕혜는 열세 살의 어린 나이에 일본에 끌려가 일본인과 정략결혼을 하고 정신병원이 갇히는 등 비참한 삶을 살았다. 하지만 덕혜는 비극적 운명의 개인이었을 뿐, 결코 위인은 아니었다. 주어진 운명에만 순응했던 덕혜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가 과연 대중의 공감을 끌어낼 수 있을까, 허 감독은 고민했다.

“소설 ‘덕혜옹주’(2009)가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걸 보면서 덕혜 이야기가 대중에게 충분히 매력적인 이야기일 수 있겠구나 싶어 용기를 얻었죠.”

영화 ‘덕혜옹주’ 허진호 감독. 
서울 종로구 팔판동 카페에서. 이훈구 기자 ufo@donga.com
영화 ‘덕혜옹주’ 허진호 감독. 서울 종로구 팔판동 카페에서. 이훈구 기자 ufo@donga.com
고민이 많아서였을까. 시나리오도 많이 바뀌었다. 영화에서 덕혜의 약혼자이자 독립운동가, 훗날 덕혜를 귀국시킨 기자로 나오는 김장한(박해일)이 그렇다. 실제로 옹주와 약혼했던 김장한, 그의 형이자 훗날 서울신문 기자가 된 김을한,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청천 장군 등 세 명을 ‘김장한’이라는 하나의 인물에 녹였다. “김장한의 시점에서 풀어나간 영화였기에 장한을 좀더 극적인 인물로 만들 필요가 있었어요.”

덕혜와 김장한의 로맨스도 많이 덜어냈다. 역사의 한 순간이 남녀간의 사랑이야기로만 읽힐까 조심스러웠기 때문이다. 키스신도 있었지만 편집됐다. 독립군 비밀가옥까지 쫓아온 일본군을 피해 도망가는 덕혜가 장한을 다시 만나지 못할까 아쉬운 마음에 입을 맞추는 장면이었다. “김장한이 그토록 집요하게 덕혜를 한국으로 데려온 건 사랑보다는 사명감 때문이었다는 의미를 담고 싶었습니다.”

‘8월의 크리스마스’(1998), ‘봄날은 간다’(2001), ‘외출’(2005) 등 그의 영화는 늘 사람과 세월이 큰 축을 이룬다. 관계와 감정, 그것이 세월을 만나면 어떻게 변할까. 이번 영화도 마찬가지다. 그가 꼽은 최고의 장면도 세월이 흐른 후 덕혜와 상궁이 재회하는 모습이었다.

“사람이 세월을 지내오면 삶에 대한 깊은 감정이 생기고 또 관조적이게 돼요. 변화된 감정, 거기에서 오는 슬픔을 제가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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