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칼럼/하정규] 정교하지만 감칠맛은 부족한 스릴러 ‘평행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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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2월 25일 15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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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나이에 부장판사에 오른 석현(지진희)과 그의 아름다운 아내(윤세아). 남부러울 것 없던 석현의 가정에 비극의 그림자가 드리운다.
젊은 나이에 부장판사에 오른 석현(지진희)과 그의 아름다운 아내(윤세아). 남부러울 것 없던 석현의 가정에 비극의 그림자가 드리운다.


평행이론이란 존재하는가?

영화를 보고 인터넷을 뒤져보니 사실 그런 과학적 이론은 없다고 한다. 링컨과 케네디가 놀랍도록 일치되는 삶을 살았다는 얘기는 필자도 들어본 것 같기는 하나 과학적 이론이라기보다는 사람들 사이에 유행하는 속설 정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가 아는 과학이론 중에 이와 유사한 것으로 '평행우주론'이라는 것이 있다. 우주의 형태와 기원에 대해서 다양한 학설이 있는데 그중의 하나가 일종의 다차원 우주론으로 여러 개의 시간과 공간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인데, 초끈이론이나 우주를 가로지르는 블랙홀 이야기처럼 신비하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현대과학이론이다.

어쨌든 '평행이론'이라는 제목은 마치 '나비효과'나, '카오스이론'을 연상시킴으로써 과학적인 호기심을 자극하는 효과가 있다. 이 영화는 좀 허무맹랑하지만 신비한 이론을 바탕으로 이미 죽는 것으로 정해진 운명을 어떻게 빠져나갈 것인가를 박진감 있고 스릴 있게 그린 영화다.

석현의 오랜 친구인 형사 강성(이종혁)은 석현 부인의 살해 사건 수사에 나선다.
석현의 오랜 친구인 형사 강성(이종혁)은 석현 부인의 살해 사건 수사에 나선다.


반복되는 인생, 반복되는 살인

살인혐의로 붙잡혀 온 늙은 과학자(오현경 분)-그는 자신이 수십 년 전 살았던 다른 사람과 날짜까지 똑같은 삶을 살고 있어 살인을 피할 수 없었다는 평행이론을 주장한다. 그를 심문하던 형사는 그것은 그냥 우연에 지나지 않느냐며 소리치지만 그는 벽에 거대한 수학공식들을 나열하며 계산에 몰두하더니 마침내 소리친다. "이런 우연은 수학적으로 불가능해!"

한편, 거듭된 명 판결로 많은 사람의 축하를 받으며 젊은 나이에 부장판사에 오르는 석현(지진희). 그러나 만인의 부러움을 받던 그의 삶은 그의 아름다운 아내가 둔기에 맞아 숨진 주검으로 발견되면서 비극으로 치닫는다. 그의 오랜 친구인 강성(이종혁)은 이 사건을 담당해서 수사에 나선다.

그 와중에 석현은 사건을 취재하는 어느 여기자로부터 30년 전 젊은 나이에 부장판사에 오른 한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시대는 다르지만, 그는 자기처럼 같은 날짜에 판사가 되었고, 같은 날짜에 그의 아내가 살해되었다는 것이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결국 이후에 남은 가족마저 한날한시에 몰살당했다는 이야기. 링컨과 케네디 대통령이 시대는 다르지만 똑같은 날짜에 반복되는 운명을 살다가 살해된 것처럼 평행이론을 말한다.

그는 처음에는 당연히 그냥 우연이거나 지어낸 이야기로 흘려듣지만, 자신에 대한 익명의 협박이 계속되고, 딸이 괴한에게 납치될 위험에 처하고 자신마저 살해위기를 당하자 점차 이 이론을 믿게 되고, 자신과 딸을 구하기 위해 자신과 동일한 삶을 살았다는 한상준 판사를 죽인 진범을 찾아 과거사건을 파헤친다.

석현의 아내는 둔기에 맞아 주검으로 발견되고 딸까지 괴한에게 납치될 위험에 처한다.
석현의 아내는 둔기에 맞아 주검으로 발견되고 딸까지 괴한에게 납치될 위험에 처한다.


정교한 구성과 거듭된 반전이 놀라운 스릴러

자신과 가족이 살해당하도록 정해진 운명에서 탈출하기 위해 주인공이 필사적으로 기울이는 노력 속에서 오싹한 소름이 돋거나 깜짝 놀라게 하는 스릴 있는 장면들이 돋보이는 점이 이 영화의 장점이다. '스릴러를 보는 재미가 바로 이런 것이구나' 할 만큼 때때로 가슴 철렁한 공포는 한여름용 피서 영화로도 적합할 것 같다.

그때그때 터지는 적절한 액션들과 복잡하고 미스테리한 과거를 추적해 가는 과정도 쏠쏠한 재미를 제공한다. 또한 과거사건과 현재사건의 범인을 함께 추적하는 복잡한 구성을 이루면서도 전반적으로 크게 흠잡을 수 없는 정교하고 매끈한 짜임새와 캐릭터, 연기, 음악들은 할리우드식 정통 스릴러의 느낌을 선사한다. 특히 후반부로 갈수록 누가 진짜 범인인가에 대해서 관객의 예상을 뒤엎는 반전이 거듭돼 재미를 더한다.

다만, 주연과 조연의 캐릭터들과 대사는 전체적으로 개성이 5% 부족한 느낌이다. 특히 말없이 순진하고 귀엽기만 한 딸아이의 캐릭터와 초반에는 그림처럼 아름답고 상냥하지만 후반에는 요부로 변신하는 아내(윤세아)의 캐릭터도 현실감이 부족하다. 이외에도 검사, 주인공의 후배(박병은), 살인용의자(하정우) 등 여러 조연도 크게 흠잡을 수는 없지만 5% 부족한 개성을 드러낸다.

'평행이론'은 범죄 스릴러라는 측면에서 '용서는 없다', '의형제'와 자연스럽게 비교된다.

'용서는 없다'의 경우 주연 배우들의 대결 연기가 돋보이고 잔인함과 충격성은 더 높지만, 할리우드 영화 '인썸니아'와 '세븐'을 너무 연상시킨다는 점에서 창의성이 현저히 떨어진다.

요즘 흥행 가도를 달리는 '의형제'는 코믹 첩보 스릴러라 할 수 있는데, 송강호와 강동원의 매력과 연기력이 돋보이는 작품이지만, 시대착오적인 1970년대 대공 수사극의 구성에다가 일관성 없는 송강호의 기존 코믹 캐릭터를 억지스럽게 결합시켜서 잔재미는 있지만 진실성이 많이 결여된 느낌이다.

필자는 할리우드적인 범죄 스릴러 공식을 충실히 구현하면서 정교함과 창의성을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위의 영화들보다는 '평행이론'에 후한 점수를 주고 싶다.

영화 '추격자'에서 살인범으로 분했던 배우 하정우는 '평행선'에서 살인용의자를 연기한다.
영화 '추격자'에서 살인범으로 분했던 배우 하정우는 '평행선'에서 살인용의자를 연기한다.


감칠 맛 부족하지만 할리우드 리메이크용으로 적합

이런 높은 완성도에도 불구하고 '평행이론'의 흥행이 부진한 이유는 한국 관객들의 특성을 간과한 탓이 아닌가 한다. 최근 '의형제'의 흥행에서 보듯이 한국관객들은 매끈하고 느끼한 영화보다는 내용이 조금 부실해도 화끈하고 감칠맛 나는 영화를 좋아하는 것 같다.

한국인들이 담백하고 느끼한 음식보다는 양념이 가득한 맵고 짠 음식을 좋아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즉 한국영화에는 늘 다소 코믹하면서 자극적이고 질퍽한 캐릭터가 등장해야 제 맛이다. 요즈음 대부분의 한국 영화에는 꼭 구수한 사투리를 구사하는 조연들이 등장한다. '친구'나 '공공의 적'에 나오는, 거칠고 투박하지만 자신의 감정과 욕구를 솔직하고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질척한 캐릭터들을 좋아하는 것이다.

이 영화에도 최소한 조연으로는 이런 감칠 맛 나는 캐릭터들이 등장했더라면 한국 관객을 더 유인하지 않았을까 싶어 아쉽다.

'평행이론'이 보여준 할리우드 공식에 충실한 정교성과 창의성은 오히려 수출용 리메이크 영화로 손색이 없다는 느낌이다. 한국보다 해외에서 더 좋은 소식이 들려오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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