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한 솔직히 김태희란 이름을 생각할 때 자동적으로 떠오르는 머리에 강하게 각인된 드라마나 영화도 크게 없었다. 이영애는 <대장금>이 있고, 배용준은 <겨울연가>가 있다. 장동건과의 로맨스로 요즘 화제가 된 고소영은 <비트>가 있다. 그런데 김태희는 CF에서 'V라인 얼굴'을 자랑하며 예쁘게 미소 짓는 모습만 먼저 떠올랐다.
가만, 여기서 다시 그녀의 이름에 다른 두 단어를 묶어 검색을 했다. '김태희 연기력 논란'. 이번에는 108만개가 검색된다.
도대체 이 아이러니는 무엇인가. 단역까지 포함해도 지금까지 4편의 영화와 6편의 드라마에 출연한 게 전부인 여배우의 연기력을 두고 이렇게 많은 이야기가 온라인에 떠돈다는 것. 그녀의 연기력이 대한민국 대중문화에 얼마나 심각한 영향을 미쳤기에 이리 난리였을까. 그럼 이번에는 스타라면 누구나 하나 이상은 갖고 있다는 루머와 그녀를 묶어 검색했다. 46만개.
그래서 이 글을 쓰게 됐다. 현역 연기자 중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미모를 지녔다고 평가받으면서, 한편으로는 마치 천형처럼 '연기력 논란'이란 꼬리표를 달고 다녀야 했던 그녀. 또 특별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적도 없는데 46만개의 루머 관련 글이 있는 그녀를 위해 누군가 한 명쯤 변명해주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았다.
▶ 그녀의 불행, 너무 일찍 신화가 된 죄(罪)
어찌보면 김태희는 연예인으로 데뷔하던 첫 걸음부터 '불행'했다.
'김태희는 신인때부터 불안했다?' 그녀의 팬들은 펄쩍 뛸지 모른다. 그녀가 처음 등장했을 때 들었던 숱한 찬사와 환호를 당신은 모르냐고….
안다. 그렇기 때문에 불행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불행'이란 대중의 관심과 미디어의 주목에 목말라하는 대다수 스타 지망생들의 겪는 그것과는 다르다.
김태희의 존재감을 각인시킨 SBS 드라마 ‘러브 인 하버드’. 출처·SBS
김태희의 불행은 오히려 활동 초기부터 지나치게 많은 관심과 주목을 받고 화제와 뉴스의 주인공으로 지냈다는 점이다.
물론 대중의 관심은 연예인에게는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정상에 있는 소수에게만 영광과 부가 집중되는 이른바 승자독식(Winner takes it all)의 스타시스템에서 대중의 관심은 그 높은 곳에 오르려고 애쓰는 사람들에게 절실한 자양분이다.
하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고 때가 있는 것이다. 김태희에게는 본인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너무 빨리, 그리고 많이 쏟아졌다.
기억을 더듬어 그녀가 연예인으로 활동을 시작했던 2000~2001년을 돌아보자. CF 모델로 얼굴을 알리기 시작했지만 "남편은 아내하기 나름"이라는 명 카피로 화제가 됐던 최진실이나, 섹시한 허리춤을 보여주며 눈길을 확 끌었던 전지현의 등장과는 달랐다. 프로필을 검색해 보면 '아, 이런 CF에 나왔지'라고 고개를 끄덕이지만, 앞의 두 사람이 나온 것처럼 특별히 오래 기억에 남는 '임팩트' 있는 광고는 아니었다.
이런 그녀가 유명해진 것은 다른 요소, 바로 '서울대 의류학과'라는 학력이었다. 많은 이들이 이른바 간판 위주의 우리 사회 풍토를 정색하며 개탄하지만, "저 CF에 나오는 신인, 알고 보니 서울대 학생이래"라는 말을 들으면 다시 한번 신경을 쓰고 바라보게 된다.
이렇게 관심을 갖고 지켜본 그 신인의 얼굴이 놀랄말큼 예쁘다는 걸 느끼면 '김태희'라는 이름 석자는 자연스레 잔상이 길어진다.
연기자로서는 단역, 조연을 거치는 중인 풋내기인데도 쏟아지는 관심은 어지간한 주연급보다 더했다. 그러다가 덜컥 한 작품의 주연을 맡자 난리가 났다. '좋다' '나쁘다' 호불호가 엇갈리는 기사와 평들이 쏟아졌다.(300만 개가 넘게 검색되는 한글페이지가 괜히 나왔겠는가)
10여 편의 출연작, 그리고 본격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햇수도 6~7년에 불과한 김태희가 몇 배 많은 작품 활동을 한 연기자들과 비슷한 중량감으로 와닿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녀에 대한 대중의 시선은 ‘서울대’라는 학벌과 ‘탁월한 미모’에만 집중된다. 스포츠동아 양회성 기자 ☞ 사진 더 보기
그러다보니 김태희는 어느새 신화가 되고 있다. 비슷한 또래, 비슷한 연차의 다른 연기자들은 현재 진행형으로 이런 저런 활동과 도전을 하고 있다. 때론 말도 안되는 선택을 하기도 하고, 시행착오라 하기엔 뼈아픈 실수도 한다. 하지만 최소한 그들은 계속 역동적으로 움직인다.
김태희보다 훨씬 오랜 경력을 가진 연기자들도 스스로의 틀에서 벗어나기 위해 변화를 한다. 멀리 찾을 것도 없다. KBS 2TV 새 드라마 <천하무적 이평강>의 예고편에서 천연덕스럽게 브아걸의 '시건방춤'을 춘 최명길, <공주가 돌아왔다>에서 볼썽사납게 망가지는 것을 서슴지 않았던 황신혜, 오연수를 생각해 보라.
하지만 김태희는 이런 기회를 갖기가 어렵다. 많지 않은 필모그래피 안에서 나름 변화를 시도했다고 하지만 그것은 사람들의 머리 속에 만들어진 정형화된 틀 안에서의 행보일 뿐이다. '김태희는 이런 연예인이다' '서울대 출신 엘리트다' '공부도 잘하고 얼굴도 예쁜…' 등등의 사방에 쳐진 그런 벽 안에서만 움직이면서 미녀스타의 신화가 될 것을 강요당했다.
▶ 그녀는 정말 연기를 못하나?
그럼 이제 본질적인 질문을 해보자. 그녀는 정말 연기를 못하는가.
김태희는 현재 KBS 2TV <아이리스>에서 국가안전국(NSS)의 프로파일러 최승희 역으로 출연하고 있다. 드라마 소개에 보면 이병헌과 멋진 로맨스를 펼치면서 한편으로는 빠른 두뇌회전과 냉철한 판단으로 테러를 사전에 차단하는 활약을 펼치는 인물로 나온다.
<아이리스>에 출연한 이후 김태희의 연기에 대한 논란은 많이 줄어들었다. 이전에는 출연할 때마다 혹독하게 시달렸는데, 이번에는 "노력하는 게 보인다", "많이 늘었다"며 긍정적인 평가가 꽤 늘었다. 아직도 그녀의 연기력에 대해 물고 늘어지는 누리꾼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 정도면 정말 큰 변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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