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희망 인터뷰]이순재 “나는 드러누워 앓을 시간이 없어요”

  • 입력 2009년 1월 1일 07시 43분


“4000만원 받고 ‘200만원짜리 연기’…그만!”

《누구나 불황과 위기와 혼란을 말했습니다. 2009년은 더욱 힘들 것이라는 말도 들려옵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 속에서도 작은 미소를 머금게 하는 일도 많았던 듯합니다. 세상은 늘 그렇게 절망과 희망이 교차하는 것인가 봅니다. 그렇게 또 새 해를 맞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희망을 이야기합니다. 우리 시대의 스타들이 스포츠동아 독자 여러분께 그 새로운 희망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나는 드러누워 앓을 시간이 없어요.”

‘고희’를 훌쩍 넘긴 배우 이순재(73)에게는 요즘 하루 24시간이 부족하다.

일주일 내내 계속되는 드라마 촬영, 학교 강의, 그가 회장과 고문을 맡은 사회단체 활동까지 소화하려면 시간이 모자란 건 물론이고 그의 표현처럼 아플 겨를마저 없다.

2008년 한 해 ‘이산’, ‘엄마가 뿔났다’, ‘베토벤 바이러스’, ‘사랑해 울지마’ 등의 드라마와 연극 ‘라이프 인 더 시어터’를 통해 365일 내내 연기와 함께 한 이순재를 만났다.

이순재는 2시간이 넘는 인터뷰에서 드라마를 포함해 그가 몸담고 있는 대중문화 전반에 대해 쓴소리와 단소리를 거침없이 쏟아냈다.

누구도 나서 말하기 꺼려했던 방송계 관행에 대해서는 통렬한 비판도 서슴없이 했다.

# 배우 이순재

- 현역 연기자중 연장자로 왕성하게 활동하는 비결이 궁금합니다.

“이제는 내 동료 배우가가 없어요. 신구, 최불암도 모두 후배에요. 하다보니 세월이 흘러 가장 연장자가 됐을 뿐인데 내가 연장자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중간에 끼어있는 세대랄까. 나이를 의식하고 그걸 권위로 착각하는 배우들이 간혹 있었는데 그들의 배우 생명은 조로했어요. 배우란 직업은 늘 백지상태인거죠.”

-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으로 ‘야동순재’가 됐다가 최근 ‘엄마가 뿔났다’로 황혼의 로맨스까지 펼쳤는데, 새로운 도전을 생명처럼 여기는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 역할을 탐구하다 보니 작품마다 다른 모습으로 보인 것 같습니다. 최근 젊은 작가들은 상황을 너무 피상적으로 그려요. 자연히 젊은 연기자들이 외모에 치중하죠.

드라마에서 가난한 주인공이 매일 좋은 옷으로 갈아입어요. 그 엉뚱한 모습에 시청자가 공감할까요? 드라마의 젊은 배우들은 마치 패션모델 같죠. 대신 역할에 대한 고뇌가 없어요.”

- 대학 강의에서 강조하는 부분도 ‘탐구하라’는 주문인가요.(그는 세종대 영화예술학과 석좌교수로 학기 중 매일 오후 7시부터 밤 11시까지 강단에 서고 있다)

“우리 아이들(그는 학생들을 이렇게 불렀다)은 모두 매일 밤늦도록 연기 연습을 하죠. 그 과정을 통해 연기가 쉽지 않다는 걸 피부로 느끼는 겁니다.

적어도 우리 아이들은 우리나라 말은 제대로 해요. TV 속 ‘날탕들’에 익숙해진 시청자들이 그 모습이 곧 모든 배우의 연기라고 여기면 곤란해요.”

- 촬영장에서 후배 연기자들을 호되게 꾸짖기도 하나요.

“친근하게 조언하죠. 단, 의식이 있고 제대로 연기하는 친구들에게만 합니다. ‘나는 스타요’하면서 건방 떨면 말도 안 꺼내요.

사실 보면 어떻게 스타가 됐는지 모를 연기자가 한 둘이 아닙니다. 그룹에서 노래하던 가수에게 덜컥 주인공을 주는 게 우리 드라마 제작 현실입니다. 발상 자체가 우습죠.

지금 톱스타 중 고두심이나 김희애처럼 나중에 엄마, 아줌마 역할을 할만한 배우가 누가 있습니까. 회당 출연료 4000만원을 받아도 200만원 어치도 못하는 연기자들이 쌔고 쌨어요.”

방송계의 잘못된 관행을 꼼꼼하게 지적하던 그는 “나는 엄격한 사람은 아니다”고 했다. 50년 넘는 세월을 카메라 앞에서 보내며 온갖 상황을 겪었지만 아무리 격한 감정에서도 ‘이 자식’이란 흔한 싫은 소리 한번 입에 담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실제로 그와 함께 연기했던 후배들은 “이순재 선생님께 배웠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한다.

# 할아버지 이순재

- 바쁜 생활 탓에 가정에선 점수를 얻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젊을 때는 더 했죠. 요즘은 양호한 편이라 가족들도 이해해줍니다. 요새는 영화 1편을 찍으면서 1년 내내 신선놀음 하지만 60∼70년대는 1년에 10편도 촬영했어요.

하루를 4등분해서 4편을 찍을 때도 있었는데 일주일에 5일은 외박이죠. 배우는 직종 자체가 자기중심적이어서 집안에서도 잔소리를 하지 않아요. 5학년 외손자와 8살 외손녀에게만은 예외죠.

용돈 달라는 심산으로 집에 자주 놀러오지만 그래도 할아버지 마음은 언제나 ‘무조건’입니다.”

# 인간 이순재

- 요즘 모두 불황과 위기를 말합니다. 새해 대중문화가 위기를 극복할 묘안이 있을까요.

“드라마와 영화 할 것 없이 초심으로 돌아가야죠. 배우의 연기나 영화와 드라마의 영상은 시청자와 관객에게 절대 사기를 칠 수 없는 분야입니다.

2004년 한류가 반짝했다고 모두 그 길을 좇았는데 시청자는 바보가 아닙니다. 거리에서, 기획사에서 검증받지 않은 배우를 데려와 드라마 만들고, 쪽대본이 나오는 환경은 결국 전체를 퇴보시킵니다. 사전제작 시스템을 도입해 가진 역량의 100%를 발휘해야 합니다.”

- 그렇다면 ‘희망’을 실천하고 실현할 수 있는 방법은 뭘까요.

“위기는 곧 기회입니다. 절망하는 사람은 희망이 없습니다. 우리는 늘 이뤄왔습니다. 그 저력은 바로 ‘우리’입니다. 대중문화도 마찬가지인데 2009년은 결속하는 한 해가 되길 바랍니다.

갈등은 중요하지 않고 화합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적은 내부가 아니라 외부에 있으니까요. 대중문화 전체의 잘못된 관행을 덮지 말고 똑바로 들여다봐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한류는 반드시 다시 옵니다.”

[2009 희망 인터뷰] 배우 이순재는?

1935년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나 서울고를 거쳐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했다.

대학 재학시절 연극에 심취해 배우의 꿈을 키웠고 1956년 연극 ‘지평선 넘어’와 드라마 ‘나도 인간이 되련가’를 통해 데뷔했다.

52년 동안 연기자로 활동하면서 사극 ‘토지’, ‘허준’, ‘상도’를 비롯해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 ‘목욕탕 집 남자들’로 인기를 얻었다.

연극 ‘세일즈맨의 죽음’, ‘바냐아저씨’ 등으로 무대에 올랐고 영화 ‘밤의 찬가’, ‘윤심덕’, ‘사람의 아들’, ‘파랑주의보’ 등에 출연했다.

92년 민자당 14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뒤 부대변인을 거치기도 했지만 다시 배우로 돌아와 연기에 몰두해 왔다.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으로 ‘야동순재’라는 친근한 별명을 얻으며 팬층을 넓혔고 이를 통해 2007년 MBC 방송연예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해리 기자 gofl1024@donga.com

사진=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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