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강영희]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를 위한 변명

  • 입력 2005년 11월 22일 03시 0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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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과 감독이 한판의 다트게임을 시작한다. 화살을 던지는 자는 희극의 주인공이 되고, 화살을 맞는 자는 비극의 주인공이 된다. 하지만 게임이 길어지면 희극의 주인공은 여론의 화살받이가 되고, 비극의 주인공은 면죄부를 얻을지 모른다.

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의 얘기다. 스물여섯 살의 신참 감독이 지원금과 쌈짓돈 2000만 원을 들여 만든 졸업 작품이다. 영화의 배경인 병영을 세트로 만들 만큼의 제작비를 마련하지 못한 감독은 비극적 결말을 해피 엔딩으로 바꿔치기한 가짜 시나리오를 제출하여 군의 제작 지원을 얻어낸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군은 감독을 ‘위계에 의한 공무집행 방해죄’로 고소할 예정이다.

태정(하정우 분)과 승영(서장원 분)은 우연히 군대에서 해후한 중학교 동창이다. 그런데 폭력이 일상 속에 스민 군대의 현실과 그럭저럭 타협한 태정과는 달리 승영은 타협하지 않을 뿐 아니라 때가 되면 현실을 개혁하겠다고 결심한다. 승영은 새로운 신참 지훈이 자신의 밑으로 들어오자 이 같은 결심을 실천으로 옮긴다. 지훈 역은 윤종빈 감독이 직접 맡았다. 문제는 지훈과 ‘새로운 관계’를 맺으려는 승영의 시도가 결코 쉽지는 않다는 것. 마침내 애인의 변심으로 균형을 잃은 지훈을 보며 승영은 불안해진다. 둘 사이에는 미세한 균열이 생기고 이 같은 균열은 결국 지훈의 자살로 이어진다. 승영도 죄책감에 시달리다 자살을 선택한다.

결론은 이렇다. 이 영화는 군대를 다룬 영화이면서도 군대만을 다룬 영화가 아니라는 것. 군대라는 제도의 폭력을 다룬 영화가 되기 위해서는 승영의 이야기로 충분했고, 승영의 이야기로 끝나야만 했다. 하지만 지훈의 이야기로 넘어가면서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것은 무엇보다 지훈이라는 캐릭터의 독특함 때문이다.

얼핏 보기에 지훈은 순진하고, 우직하며, 어수룩한 인물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외면이 그럴 뿐이다. 다시 자세히 보면 지훈은 어딘가 오만하고, 머리 회전이 빠르며, ‘왕자병’의 기질도 있어 보인다. 이 같은 혼란은 어디에서 생겨나는 걸까. 문제는 지훈이 지닌 비극적 결함(hamartia)에서 비롯된다. 무엇보다 그는 자폐적이며 소통 불능에 빠진 고립된 영혼이다. 그는 타자와의 관계에서 주체의 수위를 조절할 줄 모르며, 자신에게 던져진 문제 앞에서 아이처럼 발버둥치는 것밖에 알지 못한다. 그리고는 망연자실 무력해진다. 벽창호 같은 지훈. 하지만 꽁꽁 닫힌 대문 안에서 벌어지는 그의 고통은 타인들에게는 기껏해야 입맛 쓴 희극으로 읽힌다.

오늘날 승영처럼 어떤 개혁을 해야 한다는 데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군대만이 대상은 아니다. 군대가 그 대상을 대표하고 상징할 따름이다. 문제는 개혁의 궁극적인 대상이 제도(制度)가 아니라 인간(人間)이라는 데 있으며, 필연적으로 개혁의 주체 자신을 포함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결코 만만치 않은 상대라는 데 있다.

개혁의 대상이 되는 오늘날의 우리 자신은 순진하고 우직한가 하면, 때로는 오만하고 머리 회전도 빠르다. 게다가 우리는 자주 소통 불능 상태에 빠진다. 이래서는 모든 것이 불가능해 보인다. 승영처럼 벽에 부닥쳐 튕겨 나온 다음 나가떨어질 수밖에 없다. 방법은 하나다. 벽을 뚫고 들어가야 한다. 외부의 벽 속에 도사린 내부의 벽과 마주쳐야 하며, 개혁의 대상과 개혁의 주체가 하나로 겹쳐져야 한다. 무엇보다 승영은 귀에 꽂은 리시버부터 뽑아 던져야 한다.

육군과 감독이 한판의 다트게임을 시작했다. 게임은 결국 씁쓸한 희비극으로 끝날 것이다. 게임이 시작됐으되, 게임을 끝내지 않는 묘안은 없을까.

강영희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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