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프리즘/김용희]기억의 정치술

  • 입력 2005년 2월 22일 18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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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한국 영화는 ‘기억의 유령’과 싸우고 있다. ‘살인의 추억’은 폭압적인 1980년대의 우회적 메타포였다. ‘박하사탕’ ‘실미도’ ‘효자동 이발사’ ‘말죽거리 잔혹사’…. 국가주의가 유포한 집단적 기억은 다시 돌아와 우리 앞에 역사의 왜곡을 폭로하고 있는 것인가. 역사란 권력자에 의해 조합되고 제도에 의해 형성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인가.

위정자들은 오랫동안 기억의 문제에 매달려 왔다. 영웅들이 전쟁에 나가고 기록을 남기는 것은 후세에 기억을 남기기 위해서였다. 진시황은 과거를 없애고 새 기억을 만들어내기 위해 분서갱유를 감행했다. 만리장성을 완성한 것은 치적을 탐했기 때문이 아니라 기억의 ‘마력’을 탐했기 때문이다. 최근 논란이 되는 서울 광화문 현판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글씨가 새겨져 있다. 서초구 양재동 예술의 전당에는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의 글씨가, 국가정보원에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글씨가 표석으로 남아 있다. 권력자들은 역사의 기억 속으로 급속히 진입해 들어가고자 했으니 역사 속에서 불멸로 남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역사에 대한 영화적 번역▼

한국 영화는 역사와 만나면서 기억이란 기실 현재에서 경험을 선택하고 조합하면서 합성시킨 것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북파공작원의 기억, 광주 학살의 기억, 기억은 체제와 제도 속에서 가공되고 번역되어 집단기억으로 고정되어 왔다. 국가주의가 은폐한 왜곡된 현실은 역사를 뚫고 표면 위로 솟아올라 스크린 위에서 부활한다.

개봉 중인 영화 ‘그때 그 사람들’은 10·26사건을 영화화했다. 군사 정권의 엄숙함과 삼엄함 속에 숨겨져 있던 여자와 술과 노래와 난장. 그 난장의 지하에서는 고문 받고 린치를 당하는 자들이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러댄다. 영화는 박 전 대통령 시해사건에 대한 정치적 시비에 주목하지 않는다. 카메라는 오히려 저 우스꽝스러운 남성중심주의 마초(macho)들에 대해 통렬한 비판을 쏟고 있다. 영화 초입부에서 박 대통령의 말 “사내 배꼽 아래에 대하여는 말하는 게 아닌기라”, 김재규의 말 “사내가 한다면 한다”, 차지철의 말 “러시아에서는 수십만 명을 죽였는데 우리도 만 명 정도는 확 밀어도 됩니더.”

강렬한 남성주의는 집단적 국가주의와 연결되면서 무모한 열정을 분출한다. 사내는 한다면 한다는 마음으로 대통령에게 총을 쏘고 앞 뒤 이유도 알 수 없던 그의 부하들은 상관이 시키는 대로 함께 총을 쏘았다. “까라면 까야 한다”는 남성집단주의는 ‘의리’와 ‘신의’로 뭉쳐야 했기에 명분도 까닭도 모르는 김재규의 부하들은 함께 사형을 당한다. ‘그때 그 사람들’은 의리와 명분이 아닌 지독한 비합리적 집단성과 정략으로 묶여져 있던 사람들이었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윤여정의 내레이션은 남성 제국에 대한 깔깔거리는 비웃음인 것이다.

영화는 파시즘 현실을 스크린 위에서 희화화하고 냉소하는 것으로 역사 현실에 끼어든다. 한국 역사가 남성중심주의와 국가주의에 대한 강박 속에서 무모한 희생을 만들어 왔다는 사실을, “우리가 남이가” 하는 강압적 형제애 속에서 폭탄주를 돌려 왔다는 사실을, 영화는 말한다. 근엄한 군복 상의 아래 팬티만 입은 차지철의 모습, 변기에 앉아 변비 때문에 제대로 일을 못 본 김재규의 낭패한 얼굴을 상기해보자. 영화는 엄숙한 역사를 익살스럽게 비웃어준다. 윤여정은 남성 집단적 폭력 논리에 대해 “니들이 사랑을 알아?”라고 소리친다.

▼예술언어와 법적 잣대▼

더 우스꽝스러운 코미디는 허구의 역사 풍자를 읽어내지 못하는 법원의 검열과 삭제다. 장례식 다큐멘터리 필름을 영화에서 빼라고 명령한 것은 관객들이 영화적 허구와 현실적 사실을 구분하지 못한다는 우려 때문이란다. 예술 언어와 사법적 시각의 차이는 언어들 간의 불일치를 보여주면서 난센스를 유발한다. 제도는 스크린에 삭제의 공백을 드러냄으로써 망각의 흔적을 보여준다. 현실제도는 다시 한번 집단 기억에 관여하면서 기억을 조종하려 한다. 우리는 여전히 ‘기억과 삭제의 시간’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김용희 평택대 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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