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과 우리, 범죄의 재구성

  • 입력 2004년 7월 23일 11시 3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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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도 안나는 중학교 때 친구 하나가 있습니다. 시골에서 전학 온 그 아이는 반 친구들에게 이유 없이 구타를 당할 때 당신이 용감하게 나서서 막아 주고, 라면 한 그릇을 사 줬던 일을 또렷이 기억합니다. 그러나 그 아이는 지금 잔인한 살인범이 되어 14년째 복역 중입니다. 지금 그가 당신에게 면회를 신청합니다. 흔쾌히 받아들이시겠습니까? 그와 인연이 닿는 것을 허락하시겠습니까?”

잔혹하고 엽기적인 방식으로 무고한 사람을 20여명이나 살해한 유영철. 온 나라를 경악케 한 이 사건의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한 방송사 PD가 우리에게 어려운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는 바로 얼마 전부터 누군가를 간절히 만나고 싶어하는 교도소 재소자에게 만남의 기회를 마련해주는, ‘교도소판 TV는 사랑을 싣고’를 준비 중인 김형민 SBS 프로덕션 PD.

김 PD에게 유영철의 얘기는 TV속 사건으로만 보이지 않는다. 그는 이번 프로그램을 준비하면서 느낀 감정과 고민을 20일 자신의 블로그(http://blog.empas.com/sanha88/?a=2722416&c=127574)에 ‘그들과 우리, 범죄의 재구성’이라는 글로 털어놨다.

김 PD에게도 죄수를 만나고 그들을 주인공으로 하는 프로그램을 만드는 일은 영 개운치가 않았다.

방금 인터뷰한 죄수가 아내를 죽인 뒤 토막 낸 남자이거나, 피해자가 입원중인 중환자실로 쳐들어가 다시 마저 찔러 죽인 여자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밀려오는 회의(懷疑)란...당장이라도 제작을 때려치우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런 껄끄러움은 재소자가 만나고자 하는 당사자도 마찬가지였다.

김 PD는 한때 같은 폭력조직에 몸 담았지만 한명은 목사가 되고, 한 명은 살인자로 감옥에 있는 친구 이야기를 풀어놨다.

살인범 친구는 김 PD에게 목사가 된 옛 친구를 만나고 싶다고 간청했지만, 목사는 ‘자기 교회 성도가 나가지 못하게 한다’는 핑계로 완강히 거절했다. 그는 나중에는 만나기 싫은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도 했다.

제작진은 “다른 사람도 아니고 길 잃은 어린 양을 인도해야 할 목사님이 어찌 그럴 수 있느냐”며 성토했지만, ‘당신이 그 입장이라면 마음 편히 나갈 수 있겠느냐’는 교도관의 물음에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고.

김 PD는 “프로그램 준비 기간 내내 엇갈리는 현실과 감정의 틈바구니에서 괴로워해야 했다”고 고백했다.

그는 “유영철은 정말 쳐 죽일 놈이고, 개인적으로는 사형반대 입장을 바꾸고 싶을 정도로 극악한 죄인임이 맞다”면서도 “하지만 우리가 욕설만 하고 그들을 제대로 감싸지 못한다면 또 다른 유영철이 나타날 것 아닌가”하고 고민했다.

받아들이기엔 부담스럽고, 내팽겨쳐 두기엔 찜찜한 우리사회 범죄자들. 우리는 과연 이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잔인무도한 살인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14년째 복역 중인 옛친구가 당신을 만나고 싶어합니다. 만나주시겠습니까?”

세상을 향해 던진 김 PD의 질문에 당신은 무어라 대답하겠는가.

최현정 동아닷컴기자 phoeb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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