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내일]오명철/‘진실 혹은 거짓’

  • 입력 2004년 5월 4일 19시 0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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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일요일 낮 MBC TV에서 방영되는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의 ‘진실 혹은 거짓’ 코너를 즐겨 본다. 이 코너는 감동적 사연과 희대의 미스터리를 골라 세 가지 이야기로 극화한 뒤 이 중 거짓 사연 하나를 골라내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진실이기를 기대한 감동적인 이야기가 거짓으로 드러나 허탈해지거나 도저히 믿기 어려운 사연이 진실로 판명돼 놀라게 되는 경우가 수두룩하다. ‘세상에 이런 일이’와 ‘세상에 이럴 수가’를 반복하며 눈을 뗄 수 없도록 하는 것이 이 프로그램의 묘미다.

얼마 전 수도권에 널리 유포됐던 ‘양재천 연가(戀歌)’도 ‘진실 혹은 거짓’의 테마가 될 만하다. 남편의 외도와 실직으로 한숨짓던 40대 여인이 고뇌 어린 모습으로 서울 강남의 양재천 일대를 산책하다 점잖은 노신사를 만나게 된다. 노신사는 오래 전 상처한 뒤 인근 타워팰리스에서 혼자 살고 있는 재력가로 둘은 서로의 처지를 동정하다 사랑에 빠진다. 노신사는 얼마 후 여인의 남편을 찾아가 사정을 털어놓은 뒤 거액의 위자료를 건네주고 합의 이혼토록 한다. 이후 두 사람은 타워팰리스에 살림을 차려 행복하게 살고 있다는 얘기다.

얘기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강남 일대 남편들이 아내들에게 앞 다퉈 양재천 산책을 권유한다”거나 “그 여인이 양재천에 갈 때 입고 다닌 것과 같은 제품의 운동복이 날개 돋친 듯 팔렸다”는 뜬소문이 퍼져나갔다. 분당에는 ‘중앙공원 버전’이 있고, 일산에는 ‘호수공원 버전’이 유포됐다. 대전에도 이와 유사한 이야기가 있다니 전국적 현상일 수도 있다. 버전과 지역에 따라 위자료의 액수는 5억원에서 30억원을 오르내린다. 노신사가 살림을 차린 뒤 곧바로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수백억원대의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게 된 여인이 전남편과 재결합했다는 후일담(後日譚)까지 전해진다.

1970년대 프리섹스 물결이 휩쓸던 미국에서는 명문대생의 순수한 사랑과 신분 차이를 극복한 결혼, 그리고 백혈병 걸린 아내의 죽음을 담은 에릭 시걸의 ‘러브 스토리’가 많은 젊은이를 감동시켰다. 이어 에이즈와 동성애, 그리고 가족의 해체가 극대화된 1990년대에는 미국 중서부 아이오와주 한 아름다운 다리를 매개로 52세의 사진작가와 45세 시골 주부가 펼친 나흘간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를 담채화(淡彩畵)처럼 그려낸 제임스 윌러의 ‘매디슨카운티의 다리’가 중년 남녀의 심금을 울렸다.

두 작품이 소설은 물론 영화로도 크게 성공한 것은, 사람은 나이와 상관없이 누구나 가슴 한구석에서 로맨스를 갈구하고 있으며 성적으로 문란해질수록 순수한 사랑에 대한 동경 또한 깊어간다는 방증일 것이다.

작금에 ‘양재천 연가’가 한국에서 광범위하게 유포된 이유는 무엇일까? 급증하는 이혼율, 배우자의 외도와 실직, 노년의 성적(性的) 고독, 거금을 주면 아내도 내어줄 수 있다는 세태, 대박 신드롬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부와 명예의 상징이 된 타워팰리스에 대한 선망과 배척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작문(作文)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개인적으로는 ‘진실 혹은 거짓’ 중에서 아무래도 ‘거짓’쪽에 무게를 두고 싶다.

오명철 논설위원 osca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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