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허엽/방송위의 아마추어리즘

  • 입력 2003년 7월 27일 19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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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초 현 방송위원회가 구성된 직후 한 전직 위원은 “재임 동안 지상파 방송사들의 집요한 로비가 견디기 힘들었다”며 “새 방송위는 지상파를 대변할 가능성이 높다”고 내다봤다. 방송위원 9명 중 노성대(盧成大) 위원장을 포함한 지상파 출신 4명 위원의 ‘친정 봐주기’를 우려한 것이다. 4명 중 3명은 상임위원이다.

아니나 다를까. 우려가 현실로 나타났다. 방송위가 23일 발표한 방송법 개정안이 그것이다. 지상파의 기존 독과점적 지위를 보장해 주는 조항들이 한둘이 아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방송 광고 시간의 한도를 현행보다 2배로 늘리고 중간광고와 가상광고의 법적 근거를 담은 조항이다.

눈을 의심할 정도였다.

방송 광고 시간 연장과 중간광고는 방송계의 ‘뜨거운 감자’로 시청자들의 동의가 필요한 사안이다. 광고 시간 연장 등은 시청자를 불편케 할 뿐만 아니라 지상파들만 살찌워 매체 균형 발전의 걸림돌이 된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지상파 방송사들은 중간광고가 74년 폐지된 이래 줄곧 부활을 원했으나 성사되지 못했다. 문화관광부도 박지원 장관 시절 중간광고를 시행령에 넣었다가 비판의 표적이 됐고 가상광고는 논란 끝에 지난해 말 방송위가 ‘도입 제외’를 발표했다.

그런데도 방송위는 의견 수렴 절차도 없이 이를 개정안에 끼워 넣었다. 비판 여론도 점점 거세지고 있다.

전국 광고 및 홍보 관련 대학교수들의 모임인 한국광고홍보학회는 25일 성명을 내고 “중간광고 등은 지상파로 하여금 이윤추구에 열중케 하며 시청자 주권을 축소시킨다”고 지적했다.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도 같은 취지의 의견서를 냈고 한 시청자 단체의 관계자는 “정말 그렇게 한다는 것이냐”고 반문하기도 했다.

방송위는 이에 대해 “방송 광고 시간과 유형이 너무 포괄적으로 시행령에 위임돼 있어 법률로 상한선을 정한 것일 뿐 시행한다는 것은 아니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법률에 광고 시간의 연장이 명시돼 있는데 시행령에 이를 반영하지 않는다면 누가 이를 믿겠는가.

지금도 지상파는 방송위를 ‘종이호랑이’쯤으로 여긴다.

지상파 TV에서 편법 협찬과 간접광고가 남발하고 있는 데 대해 방송위는 “엄중 규제를 하고 있다”고 하지만 얼마나 개선되고 있는지 의문이다. 오전 1시까지인 지상파 방송 시간 규정도 광고 수입 때문에 고무줄처럼 늘어나기 일쑤다.

특히 지상파 3사는 지난해 각각 1031억원(KBS·매출액 1조2932억원), 952억원(MBC본사·7272억원), 991억원(SBS·6361억원)의 당기 순익을 냈고 매출액은 방송 시장의 약 90%를 차지하고 있다. 고작 나머지 10%를 10개의 지역민방, 109개의 SO(케이블 방송국), 131개의 PP(방송채널사용사업자)와 수많은 라디오들이 나눠 먹고 살아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방송법 개정안은 새 방송위의 자세를 엿볼 수 있는 시험대였다. 그러나 이번 논란으로 인해 방송위는 전문성 부족과 시청자 중심의 사고를 하지 못한다는 비판을 면키 어렵게 됐다.

파문이 일자, 지상파 출신이 아닌 한 위원은 “신문을 보고 일부 문제점을 인식하게 됐다”고 말했고 노 위원장은 “개정안은 초안일 뿐이며 얼마든지 수정될 수 있다”고 한발 후퇴했다.

방송위는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주위에서 흔들어대는 통에 권위가 서지 않는다”고 불평한다. 그러나 권위는 누가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세워나가는 것이다. 방송위의 불만은 스스로 아마추어임을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허엽 문화부 차장 he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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