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로 뉴스]한국영화, 왜 주인공들을 계속 죽일까

  • 입력 2001년 3월 1일 18시 22분


"사의 찬미"

한국영화의 주인공들이 죽고 있다. 2000년을 연 한국영화의 대표작 ‘박하사탕’부터 가장 최근의 ‘번지 점프를 하다’에 이르기까지 대다수의 한국영화들에서 주인공의 죽음이 목격되고 있다. 이는 앞으로 개봉을 앞둔 ‘선물’ ‘인디언 섬머’ ‘무사’ 등의 영화에서도 발견되는 현상이다.

이런 일은 대중영화가 상식적으로 해피엔딩을 선호한다는 기존 통념에 어긋난다. 우연의 일치일까, 일종의 유행일까. 아니면 영화가 현실의 거울이란 시각에서 분명 어떤 정신분석학적 문맥을 감추고 있는 것일까. 그 내부를 들여다 본다.

[[죽음의 나르시시즘]]

죽음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운명적으로 피할 수 없는 죽음과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소멸시키겠다는 분명한 의지로서의 죽음이다.

요즘 한국 영화에서 반복되는 주인공들의 죽음을 주목하고 있는 영화평론가 정성일은 그것이 후자로서의 죽음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는 “자아와 세계가 불화에 빠졌을 때 너무도 쉽게 자아를 지워버리는 방식으로 돌파구를 찾는 것에서 자아에 대한 진지한 근심의 부재와 자아에 대한 과도한 사랑을 읽어낼 수 있다”고 말한다.

‘공동경비구역 JSA’에서 이병헌의 불현듯한 자살은 별다른 만류없이 치뤄진다. ‘비천무’에서 신현준과 김희선은 아들의 장래를 걱정하지 않고 서로에 대한 사랑에 빠져 죽는다. ‘단적비연수’에선 아예 주인공 전체에 대한 학살이 감행된다.

또 이를 받아들이는 관객들의 태도가 유희적 쾌락 보다는 무의식적 희열에 가깝다는 점에서 대중의 욕망 속에 죽음에 대한 나르시시즘이 짙게 배어있다고 정씨는 지적한다.

[[에로스에서 타나토스로]]

프로이드는 인간의 기본 욕망으로 성에 대한 욕망인 에로스, 죽음에 대한 유혹인 타나토스를 들었다.

한국영화는 과거 ‘애마부인’시리즈를 필두고 최근의 ‘거짓말’까지 에로스에 대한 강렬한 집착을 보여왔다. 하지만 최근 그 양상은 죽음에 대한 과도한 집착으로 변모한다. ‘섬’에서는 낚시바늘을 집어삼키고 ‘리베라메’에선 불구덩이 속에서 자신을 태워버리는 자학적 양상을 띤다.

이런 욕망의 전이가 일어난 것은 바로 외환 위기로 상징되는 한국사회의 좌절의 시기와 일치한다. 영화평론가 심영섭은 “생계문제로 주눅든 소시민적 일상에서 일탈을 꿈꾸는 주인공들에겐 기껏해야 과장된 영웅주의적 죽음이나 자학적 자기 소멸의 형식으로 저항할 수 밖에 없다”고 해석한다.

[[전 세대와의 단절]]

외환위기가 됐든 변혁에 대한 욕망의 좌절이 됐든, 한국영화에서 발견되는 죽음에선 지독한 폐쇄주의와 현실에 대한 냉소주의의 냄새가 짙다.

영화평론가 조희문 교수는 이를 “최근 한국 감독들의 연령이 젊어지면서 너무 쉽게 절망하고 포기하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젊은 감독들은 관념적 멋에 빠져 현실에 적응하려는 노력이 부족하다는 것. 이 때문에 임권택 감독의 ‘춘향뎐’이나 배창호 감독의 ‘정’에서 발견할 수 있는 삶에 대한 긍정과 포용은 촌스러운 것으로 치부된다.

정성일씨의 비판도 맥락을 같이한다. 최근의 한국영화에선 에드워드 양, 왕자웨이, 지아장커, 아오야마 신지 등 다른 아시아 거장 감독들의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어떻게든 ‘살아남으라’는 화두를 발견할 수 없다는 것. 그는 이를 “아버지로 상징되는 윗세대와의 단절을 꿈꾸면서도 뭔가 새로운 돌파구를 찾기 위한 치열함은 없기 때문이 아닐까”라고 반문했다.

<권재현기자>confetti@donga.com

#주인공이 사망하는 한국영화#

박하사탕-설경구가 달려오는 기차앞에서 절규하며 자살

해피엔드-전도연이 불륜을 발견한 남편 최민식에게 살해당함

아나키스트-장동건 정준호 김상중 등 주인공 대부분이 독립운동중 사망

비천무-신현준과 김희선이 아들을 남겨둔 채 절명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형 유승완은 눈이 멀고 동생 유승범은 패싸움에서 죽음

단적비연수-최진실 김석훈 설경구 김윤진 이미숙 주인공 5명 몰사

리베라메-차승원 불구덩이 속으로 걸어들어가 자살

공동경비구역JSA-이병헌 권총 자살

물고기자리-이미연 음독자살

하면된다-정준 한명을 제외한 보험사기단 가족 전원 사망

하루-고소영 이성재 부부가 어렵게 얻은 자식이 하루만에 숨짐

번지점프를 하다-이병헌 로프 없는 번지점프로 자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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