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입력 2000년 7월 3일 19시 01분
공유하기
글자크기 설정
이맘때면 조용한 발라드 음악이나 다소 무거운 힙합풍의 음악은 마치 긴 팔 옷을 입은 듯 답답해지고 2박자의 비트와 간단한 멜로디의 댄스 음악이 곳곳에서 들리기 시작한다. 그 음악이 시간을 두고 살아남을 수 있는 완성도를 가질 필요는 없다. 사랑의 욕구나 행위는 예나 지금이나 그리 다르지가 않은 법, 어차피 만족되는 순간 사라질 운명이기 때문이다.
작년에 ‘부담’가지 않는 얼굴로 ‘선택’을 요구하던 백지영이 올 여름에는 보다 과감하게 ‘대시(Dash)’하더니 ‘새드(Sad Salsa)’에선 그야말로 어떤 극단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이 극단인 이유는 단지 그가 부벼대고 흔드는 모습이 가족시청시간대에는 보기 뭐하다고 TV방송의 옴부즈맨 코너마다 항의가 있기 때문은 아니다. 그런 항의야 과거 엘비스 프레슬리 이래 미국에서도 수없이 있던 것이었다. 오히려 그보다는 백지영다운 어떤 극단이 ‘Sad Salsa’로 표현된다는 말이 정확하다.
백지영다운 극단은 묘한 이중성의 세계이다. 배꼽을 드러내는 것을 지나 골반이 드러나는 그의 의상이나 빠르면서도 약간은 슬픈 목소리, 요즘에는 카메라도 가까이 비추길 겁내하는 그의 춤은 여지없이 섹시한 댄스 스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재미있는 것은 춤을 추고 있지 않을 때의 모습이다. 다듬어지지 않은 거침없는 말투나 시원시원한 목소리 등 백지영은 게슴츠레하게 유혹하는 얼굴이 아니라 귀엽고 맑은 미소년풍의 얼굴을 지니고 있다. 올해는 좀 나아졌지만 작년의 그의 모습은 다소 어설퍼서 섹시하게 보이기 위해 애를 쓰는구나 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성공의 열쇠는 오히려 이 부분에 있었다. 순진하고 전투적으로 노력하는 모습, 잘 못하는 사람이 잘 하려는 모습은 여러 가지 욕구를 자극한다. 사회적인 섹시 욕구에 부응하기 어려워 열등감을 지닌 많은 여자들에게는 “그래 나도 섹시해질 수 있어”라는 만족감을, 범람하는 성문화 덕분에 단순한 성적 기호에는 지쳐버린 남자들에게는 마치 원조교제를 즐기듯 “그것 참 제법 열심인데”하며 욕구를 자극한다. 이 부분에선 이정현의 성공도 그리 먼 거리에 있지는 않다.
백지영의 이중성은 다른 곳에도 있다. 백지영의 목소리는 슬프면서도 강렬하다. 그는 소리지르면서 스스로 무대를 주도하는 능동성을 보이지만 그러한 강렬함 뒤에는 울음을 참고 있는 듯한 느낌의 발성과 의지하고 싶어하는 몸짓이 있다.
인간이 가진 성적 욕구의 이중적인 면이 여기에 있다. 능동성과 수동성, 가학성과 피학성. 이 둘이 조화를 이루고 있든, 아니면 어떤 일면이 강조돼 미숙한 다른 일면이 문제를 일으키든 간에 이러한 양면성을 가지지 않은 사람은 없다. 어머니의 가슴을 깨물며 파고들다가도, 어머니의 토닥거리는 손에 잠드는 것이 우리의 어릴적 모습이다.
사실 이러한 특징이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이 라틴 음악이다. 라틴 음악은 강렬하면서도 슬프다. 그런 면에서 백지영이 라틴 음악을 들고 나온 것은 비록 시대적인 유행에 기댄 것이라 하더라도 그의 목소리에 가장 잘 어울리는 조합이다.
게다가 그는 열심이다. 이러한 열심이 영화 ‘쉘 위 댄스’에서 볼 수 있는 자연스런 감정이나 욕망의 표현과는 조금은 거리가 있는 성공에의 욕망에서 나온 것이라 조금은 어설프지만, 그래도 그의 노래에 생명력을 주기에는 충분하다.
라틴 음악의 생명력은 가장된 섹시함이 아닌 진실한 에너지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사실 성공에의 욕망이란 한국 여성에게서 능동적이고 공격적인 성적 욕구가 안전하게 탈출해 나온 하나의 출구이기도 하다.
이젠 더 이상 단순한 성적 기호로는 ‘욕망’이 충분히 자극되지 않는다. 또한 음반 산업의 만성적 불황은 보다 넓은 층에 호소할 수 있는 새로운 성적 기호를 필요로 하고 있다. 단순히 섹시하기만한 김완선과 ‘룰라’의 김지현의 시대에서, 보다 다중적인 성적 욕망을 자극할 수 있는 다층적인 이미지를 지닌 섹시 스타로의 이전은 백지영을 통해 그 한 극단을 보여주고 있다.

서천석<서울대병원 신경정신과 레지던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