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리우드 밀레니엄 화두]"20세기 반성…인간적가치 회복"

  • 입력 2000년 3월 16일 19시 3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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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밀레니엄의 벽두. 영화는 우리에게 무슨 말을 건네려 하는 것일까.

현재 국내 상영 중이거나 곧 개봉될 할리우드 영화 ‘소년은 울지 않는다’ ‘인사이더’ ‘허리케인 카터’ ‘서머 오브 샘’은 빛의 속도를 뒤쫓는 이 시대에 어쩌면 시대착오적일 만큼 무겁다는 특징을 공유하고 있다. 공교롭게도 멀리는 1960년대(‘허리케인 카터’)에서 가깝게는 현재진행형(‘인사이더’)인 사건에 이르기까지 모두 실화를 토대로 한 이 영화들은 흑인과 남장여자, 펑크족 등 소수의 인권을 짓밟는 폭력, 억압적인 조직에 맞서는 개인의 용기를 다뤘다. 할리우드의 전유물인 거대 스펙터클과 결별한 채 부담스러울 만큼 진지해지고 ‘현실’에 눈을 돌린 이 영화들이 공통적으로 말하려는 건 무엇일까?.

이 영화들에는 미국적, 20세기적 가치에 의문을 던지는 상징들이 다분하다. ‘인사이더’에서 PD역을 맡은 로웰(알 파치노 분)은 좌파 사상가 헤르베르트 마르쿠제의 제자. 진실의 힘으로 사회를 개선할 수 있다고 믿는 그의 이상은 방송사의 진실 은폐 기도에 맞닥뜨려 위기에 처한다. 그가 신승(辛勝)을 거둔 뒤 “한 번 실추된 명예는 되돌릴 수 없다”며 방송사를 떠나는 마지막 장면은 거대 자본이 지배하는 미국에서 이상주의적 낙관론의 빛이 바래고 영웅이 추락했음을 보여준다.

‘소년은 울지 않는다’에서 남장여자 브랜든(힐러리 스왱크)이 친구였던 백인 노동자들에게 처참하게 유린당하는 장소가 미국 서부 네브라스카 주라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이 영화는 과거 미국의 거친 ‘서진(西進) 정책’의 잔인성과 함께 남성 중심의 역사에 대한 참혹한 문제제기라는 측면에서 이해되기 때문이다.

20년 전 뉴욕의 연쇄살인사건을 그린 ‘섬머 오브 샘’의 처음과 끝에서 “현재 뉴욕은 안전한 도시”라고 반복되는 내레이션은 역설적으로 과거의 악몽이 현재로 시간여행하도록 만든다. 비무장의 흑인에게 41발의 총탄세례를 퍼부어 살해한 뉴욕경찰들이 지난달 무죄평결을 받은 ‘제2의 로드니 킹 사건’은 이 악몽의 경악스러운 재현이라 할 만하다.

개인을 옭죄는 거대 조직, 다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가해지는 가혹한 폭력, 견고해보였던 공동체에 유령처럼 떠도는 신경증적인 불안과 불신, 곤경에 처한 남편들의 곁을 떠나는 아내들, 붕괴되는 가족…. 세기초에 이 땅에 찾아온 할리우드 영화들이 그리고 있는 20세기의 지형도는 우울하기 짝이 없다.

다시 휴머니즘일까. 20세기적 가치에 의문을 던지는 이 영화들의 바탕에는 인간적 가치와 휴머니즘에 대한 옹호가 짙게 깔려 있다. ‘인사이더’에서 마르쿠제 후예의 이상은 벽에 부닥쳤으나, 보통 사람의 희생을 각오한 용기는 인정을 받는다. ‘허리케인 카터’에서 인종차별에 맞서는 흑인영웅(덴젤 워싱턴)이 감옥에서 핍박받는 성자처럼 변해가는 모습은 “부당한 투옥을 저지르는 정부 밑에서 의인을 위한 참된 장소는 감옥”이라고 했던 헨리 소로우의 불복종 정신을 연상시킨다. ‘소년은 울지 않는다’의 남장여자와 ‘서머 오브 샘’의 펑크족은 폭력 앞에 속수무책인 가련한 희생양이 되어 ‘차이에 대한 관용’이 얼마나 절실한 가치인지를 온 몸으로 증언한다.

폭력으로 얼룩진 20세기에 무시됐던 인간적 가치를 이제 돌이켜 보자고 제안하는 듯한 이 영화들은 역사의 격변기마다 제기됐던 근본적 질문, 새로운 밀레니엄의 출발지점에서 인간이 다시 돌아가야 할 성찰의 자리로 대두되고 있는 휴머니즘의 부상과도 맞닿아 있다.

어느 전환기에나 선구적인 예지자들이 있었다. 20세기가 시작될 때 이탈리아 시인 마리네티가 ‘미래파 선언’(1909년)에서 공격적이고 파괴적인 힘, 대군중과 혁명의 물결을 찬양했던 것처럼, 새 밀레니엄의 벽두에 할리우드는 무거운 목소리로 개인의 자유와 소수자의 인권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언제 할리우드가 자신의 ‘본분’을 잊은 적이 있던가. ‘반성과 성찰의 시즌’인 세기의 전환기에 할리우드는 발빠르게 인간이 목말라하는 존엄한 가치들을 전파하지만 곧 여름이 다가오고 아카데미 시즌이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거대 스펙터클과 판타지의 세계로 귀환하게 될 것이다.

<김희경기자> susan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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