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대 대통령 선거에서 유권자들이 주목한 노동 공약은 ‘주4.5일제’ 도입이었다. 이재명 대통령은 주4.5일제를 도입하는 기업에 인센티브를 제공하고, 장기적으로는 주4일제 전환을 목표로 해야 한다고 밝혔다. 국민의힘은 월∼목요일에 1시간씩 더 일하고 금요일에는 4시간만 근무하는 형태의 주4.5일제를 제시하며 논의에 가세했다.
정치권의 근로시간 단축 움직임에 경영계는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한국노동연구원에 따르면 한국의 노동생산성은 2023년 기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맹국 38개국 중 33위(시간당 44.4달러)로, 미국(77.9달러), 독일(68.1달러) 등과 비교해 크게 낮다. 미국 대비 한국의 노동생산성은 57% 수준에 불과하며 독일과는 65% 수준이다.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는 이를 근거로 생산성 향상 없이 주4일제 도입은 기업 부담이 크다는 입장을 밝혔다.
● 노동계, “노동생산성으로 효율 비교는 무의미”
노동계는 시간당 생산성 계산 방식에 한계가 있다고 지적한다. 한국은 장시간 노동을 하다 보니 생산성이 낮게 나오는 착시 효과가 있다며 근로시간이 줄어들면 생산성이 높아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2022년 기준 한국의 1인당 연간 근로시간은 1901시간이다. OECD 회원국 평균 연간 근로시간인 1752시간보다 149시간 더 길다. OECD가 국가별 생산성을 비교하는 노동생산성 수치는 국내총생산(GDP)을 총근로시간으로 나눠 계산한다. 노동계는 한국의 총근무시간이 OECD 회원국 중 3위란 점을 지적한다. 총근무시간이 긴 탓에 다른 회원국에 비해 생산성이 낮게 나온다고 지적한다.
정흥준 서울과학기술대 경영학과 교수는 “미국 등 선진국과 한국 노동생산성 차이가 2배 가까이로 나는 이유는 GDP와 근로시간을 중심으로 산정하는 노동생산성이라는 지표 자체에서 나온다”며 “미국과 한국의 GDP 차이는 2배 이상 난다. 한국은 노동시간도 OECD 최상위권이기에 노동생산성으로 국가별 근로 효율성을 비교하긴 어렵다”고 말했다.
서비스업, 자영업자, 중소기업 비중이 높은 한국의 노동시장 이중구조도 노동생산성에 큰 영향을 미친다. 통계청에 따르면 2024년 기준 한국 비정규직 근로자 비율은 전체 근로자의 38.2%에 달한다. OECD가 2019년에 진행한 조사 결과에 따르면 한국과 산업구조가 비슷한 일본, 독일과 비교했을 때 일본은 대기업 대비 중소기업 생산성이 약 50%, 독일은 약 60%에 달하는 반면 한국은 32.5%에 그쳤다. 이는 대기업·중소기업 간 기술력 및 인력 격차, 인프라 불균형 등 이중구조 문제에서 비롯되는 문제다.
따라서 노동계는 OECD 노동생산성 지수만으로는 한국이 ‘열심히 일하지 않는 나라’라고 단정 지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총)은 올해 4월 29일 대선을 앞두고 ‘주 4일제 도입 및 노동시간 단축 4대 요구안 발표 기자회견’을 열어 주4일제 도입을 요구했다.
한국노총은 “한국은 국제노동기구(ILO) 및 유럽연합(EU) 장시간 노동 기준인 48시간 이상 근로 비중이 17%로 EU 평균 7.3%에 비해 두 배 이상 많다”며 “아이슬란드, 스페인, 프랑스, 영국, 미국 등에서 진행된 주4일제는 다양한 긍정적 효과들이 확인되고 있다. 디지털·플랫폼과 인공지능(AI) 도입 등 산업구조와 일하는 방식이 변화하고 있다면 ‘사회적으로 달성해야 할 기준’의 노동시간 체제도 달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 이중구조 해소 없는 주4일제 도입은 격차 심화
하지만 노동시장 이중구조가 뿌리 깊은 한국의 노동시장 현실에서 주4일제 도입은 오히려 대기업과 공공기관의 ‘혜택을 받는 사람’과 중소기업의 ‘받지 못하는 사람’ 간의 격차를 벌릴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국의 전체 근로자 중 서비스업 종사자가 차지하는 비율이 75%에 육박한다. 주5일제로 전환되던 2000년대 초와 비교하면 서비스업 종사 비율은 약 16% 늘었으며 제조업 종사 비율은 약 10% 줄었다. 현실적으로 주4일제의 혜택을 받기 어려운 서비스업 자영업자와 비정규직 비율이 크다. 여기에 열악한 노동 조건에 처한 5인 미만 사업체 근로자, 플랫폼 노동자도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2024년 기준 전체 사업장의 약 84.7%, 전체 근로자의 36.3%가 5인 미만 사업장에서 근무하고 있다. 이들은 주52시간제, 연차휴가, 유급휴일 등 근로기준법 적용 대상이 아니다. 주4일제가 시행돼도 혜택을 받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서비스업 노동생산성이 떨어지는 것도 문제다. 한국생산성본부에 따르면 한국의 부가가치 노동생산성 통계에서 제조업 취업자당 생산성(13만8272달러)은 OECD 평균을 웃도는 반면 서비스업(6만5657달러)은 OECD 평균의 약 64% 수준에 그쳐 ‘제조업 선진국·서비스업 후진국’ 이중구조가 나타났다. 근로시간이 줄어들면 전체 근로자의 4분의 3을 차지하는 서비스업 근로자들의 소득 저하 및 고용 불안으로 이어질 수 있다.
전문가들은 주4일제 논의에는 노동생산성 제고뿐만 아니라 업종별 기업별 특성을 반영해 중소기업·비정규직·플랫폼 노동자를 포함한 총체적 노동개혁이 선행돼야 한다고 지적한다.
권혁 고려대 노동대학원 교수는 “최근 노동 환경의 흐름을 고려했을 때 제조업 중심 ‘근로시간=성과’ 공식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고, 근로시간의 적시성(필요 시점에 집중해 성과를 내는 것)과 탄력적 운영이 더 중요한 개념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권 교수는 “주4일제가 일부 대기업·공공기관에만 적용될 경우 노동시장 불균형이 더욱 심화될 수 있다”며 “제도 도입 이전에 중소기업 경쟁력 강화와 이중구조 해소가 우선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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