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터리와 결혼한 여자’ 삼성 R&D 첫 女부사장 오르다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2월 5일 03시 00분


김유미 삼성SDI 부사장 승진자 눈길

김유미 삼성SDI 부사장. 삼성SDI 제공
김유미 삼성SDI 부사장. 삼성SDI 제공
‘배터리와 결혼한 여자.’

4일 단행된 삼성그룹 2016년도 임원인사에서 부사장으로 승진한 김유미 삼성SDI 소형전지사업부 개발실장(57)을 부르는 말이다. 결혼도 하지 않고 30여 년간 배터리에만 자신의 인생을 ‘올인’해 붙은 별명이다.

삼성SDI의 주요 수익원으로 자리매김한 배터리 사업의 ‘역사’로도 불리는 그는 삼성그룹 연구개발(R&D) 분야 최초의 여성 부사장이다. 삼성뿐 아니라 국내 주요 그룹을 포함해도 마케팅이나 서비스 기획 등이 아닌 R&D 분야에서 여성이 부사장에 오른 건 처음이다.

김 부사장은 충남대 화학과에서 학·석사를 마친 후 1982년 한국화학연구소와 표준연구소 전기화학실 등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다 1996년 삼성전관(현 삼성SDI)에 과장으로 입사했다. 그는 “내 연구가 실제 제품으로 만들어져 소비자에게 판매되는 것을 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여성과 지방대라는 불리한 ‘스펙’이었지만 삼성은 10년 넘게 배터리 한 우물만 판 점을 높이 사 스카우트했다. 김 부사장의 영입은 삼성에 ‘신의 한 수’가 됐다. 이후 삼성SDI가 개발해낸 2차 전지 중 김 부사장의 손길을 거치지 않은 제품이 없다.

특히 김 부사장 입사 2년 후인 1998년 5월 삼성SDI가 내놓은 1650mAh 용량의 원형 배터리는 전자업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배터리 분야에서는 아직 시장 점유율이 미미했던 삼성SDI가 당시 주류였던 1400mAh를 뛰어넘는 제품을 시험생산 라인 설치 6개월 만에 내놓았기 때문이다. 이 제품 개발의 주역이 바로 김 부사장이다.

삼성SDI의 R&D 인력 500명 중 여성 비중은 10%에 불과하다. 그나마 최근 들어 조금씩 늘어난 게 이 정도다. 특히 2차 전지는 개발뿐만 아니라 개발 완료 후 고객사가 승인하기까지의 과정도 험난하다. 김 부사장은 고객과 단 20∼30분 동안의 만남을 위해 지역을 가리지 않고 방문했다. 서울에서 오전에 출발해 미국이나 유럽에 새벽에 도착해 일정을 시작하는 강행군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 덕분에 삼성SDI 임원 중 비행기 탑승 기록이 가장 많다.

155cm의 자그마한 체구 어디에서 그런 힘이 나왔을까. 김 부사장은 “세계 시장을 선도할 수 있는 제품을 개발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심장이 뛰었다”며 “사업을 시작하자마자 외환위기가 터졌지만 회사가 흔들리지 않고 2차 전지를 미래 수종(樹種) 사업으로 밀어줬기에 오늘날 세계 일류가 될 수 있었다”고 했다.

김 부사장은 많은 여성들을 좌절시키는 ‘유리천장’에 대해 “나는 상사 복(福)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내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또 다른 이유는 여자라고 해서 상사들이 특별히 차별하지 않았다는 것”이라며 “상사들이 아주 공정했고, 나도 직급이 올라갈수록 그렇게 해야겠다고 배웠다”고 말했다.

앞으로의 포부는 ‘소재 일류화’다. 배터리는 일류가 됐지만, 그 속에 들어가는 소재는 일본의 벽을 아직 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후배들에게 “자기가 필요하다고 판단해서 하는 업무는 재미도 있고 스트레스도 덜 받는다”며 “회사에 나를 대신할 수 있는 대체재가 없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자기 계발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황태호 기자 taeho@donga.com
#삼성r&d#배터리#김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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