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채 파문으로 본 취업청탁 실태… 누가 왜 반칙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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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9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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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명 뽑는데 1000건 청탁 쏟아져 ‘누구 빽이 더 센가’ 순위 매기기도

“앞으로 취업 청탁이나 인사 청탁을 하거나 받는 임직원은 옷 벗을 각오를 하세요.”

몇 해 전 10대 그룹의 한 총수는 임원회의 때 이렇게 경고했다. 회의가 끝난 뒤 핵심 임원만 모여 이 발언을 외부에 공개할 것인지를 놓고 심각한 토론을 벌였다. 그룹 최고경영자(CEO)의 청탁 근절 의지를 천명하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지만 그 위험 부담이 너무 클 것 같다는 의견이 대다수였다. 결국 내부적으로 취업 청탁을 더욱 엄격히 배제하자는 결의를 다지는 것으로 ‘조용히’ 넘어갔다. 이 그룹의 한 임원은 “요즘처럼 취업난이 극심하고 특히 청년실업이 심각한 상황에서 어느 누가 취업 청탁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있겠느냐”고 되물었다.

유명환 전 외교통상부 장관의 딸 특혜채용 사건은 국무총리 후보자와 장관 후보자 2명의 낙마보다 사회적 파급력이 더 컸다. 이명박 정부가 내세운 ‘공정한 사회’에 대한 국민적 관심도 증폭시켰다. 전문가들은 “특혜채용 사건은 취업난, 청년실업, 부모의 청탁능력, 유권취직(有權就職) 논란 등 취업 희망자와 부모 모두에게 민감한 한국 사회의 뇌관을 건드렸다”고 말한다.

인사 청탁이 많았던 예전과 달리 요즘은 ‘제발 취직만 되게 해 달라’는 취업 청탁의 시대다. 공공영역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은 민간 분야의 광범위한 취업 청탁 풍속도를 들여다봤다.

○ 모집 정원보다 더 많은 취업 청탁

최근 신입사원 200∼300명 모집공고를 낸 한 중견기업에는 취업 청탁이 1000건 이상 밀려들었다. 이 회사는 입사자 선별에 앞서 청탁 리스트부터 만들어야 했다. △얼마나 ‘센 사람’이 청탁했느냐 △청탁의 강도는 어느 정도냐 △청탁을 들어주면 회사에는 어떤 도움이 되느냐 등을 따져 순위를 매기는 작업을 벌였다.

채용공고를 낸 기업들의 관련 국회 상임위원회는 대표적 취업 청탁 통로 중 하나. 예를 들어 항공사 승무원을 뽑을 때는 국토해양위원회나 지식경제위원회 소속 의원실로 “우리 딸이 원서를 냈으니 그 회사에 얘기 잘해 달라”는 민원이 쇄도한다. 의원들은 이른바 지역구의 유지나 후원회의 ‘큰손’들이 부탁한 사안은 ‘최대한 성의’ ‘각별한 관심’이라고 따로 메모해 특별 관리한다. 한나라당의 한 초선 의원은 “자녀 취업을 부탁하는 지역 주민들의 민원서류가 과일 상자 하나 가득이다. 의원 되고 가장 힘든 일이 취업 청탁”이라고 말했다. 몇몇 의원은 취업 관련 민원을 전담하는 보좌관을 따로 둘 정도다.

자동차나 항만업계처럼 ‘강성 노조’가 있는 회사에는 노조를 통한 취업 청탁도 끊이지 않는다. 부산에서는 항만에 취업시켜주겠다며 76명으로부터 총 12억 원을 받은 항운노조 간부가 구속된 일도 있었다.

취업전문업체 스카우트가 최근 기업 인사담당자 630명을 조사한 결과 47.3%가 청탁을 받은 적이 있고 그중 73.2%가 ‘그 청탁에 따라 채용한 적이 있다’고 대답했다. 한 시중은행 인사담당 관계자는 “주요 거래처 사장이나 핵심 VIP 고객이 ‘우리 아들이 당신네 은행에 지원했으니 관심을 가져 달라’고 하면 은행 영업 차원에서 무시하기 힘들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 취업 청탁의 새 통로, 인턴

요즘 취업 청탁의 약한 고리로 주목받는 영역이 인턴사원 선발이다. 인턴은 자기소개서나 영어점수 등 비교적 단순한 자료로 뽑기 때문에 인사권자가 재량을 발휘할 여지가 크기 때문이다. 한 정보기술(IT)업계 대기업 임원은 “인턴사원으로 뽑혀 업무역량을 보이면 정식 선발 때 가산점을 주는 경우가 많아 인턴 청탁이 점점 극심해진다”고 말했다. 이 임원은 “나중에 우리 회사가 부탁할 일이 있는 분이거나 관련 정부부처 고위직의 인턴 청탁은 반영되도록 신경 쓰는 편”이라며 “이런 사실이 보도되면 청탁이 더 쇄도할 것 같아 걱정”이라고 말했다. 이 업계에서는 어느 고위 공직자의 이런 청탁이 너무 빈번해 뒷말이 나올 정도이다.

다른 IT 대기업 관계자는 “인턴 청탁이 어느 정도 통하는 게 현실이지만 형편없는 스펙을 가진 지원자가 선발되는 일은 없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이른바 SKY(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출신과 서울의 다른 두 사립 S대 수준 학벌은 돼야 청탁이 먹힐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설명이다.

정유업계의 한 임원은 “요즘은 인턴사원 중에서 정규직을 선발할 때 청탁이 들어오는 사례가 늘고 있다. 다른 임원이 ‘그 인턴 일 잘하던데, 내 대학동창의 아들이야’라고 말하면 정규직 채용 때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모 정유회사에서는 매우 불성실했던 인턴이 정규직으로 뽑혀 사내 논란까지 일었으나 결국 계열사 임원의 자녀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 취업 청탁에 대한 이중 잣대

“저희 부모님은 이 은행의 VIP 고객이고 제 친인척 중에도 자산가가 많아서 은행 영업에 큰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요즘 대형은행의 채용 면접에서는 이렇게 자신을 소개하는 지원자가 종종 등장한다고 한다. 자신의 ‘가정 배경’도 남다른 능력의 하나로 강조하는 것이다.

취업포털 사람인이 취업 희망자 1053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취업을 위해 청탁을 생각해봤다는 대답이 58.4%였다. 더 흥미로운 것은 청탁하려는 이유. ‘취업이 힘들어서’(57.1%)라는 대답 다음이 ‘청탁도 능력이어서’(13.2%)였다. 이런 인식 때문에 법률시장에서조차 취업 청탁 풍조가 사라지지 않는다. 대형 로펌의 한 관리자는 “사법연수원생 졸업철이 되면 ‘다소 성적은 낮지만 로펌에 들어갈 수 없겠느냐’는 청탁이 6, 7건씩 들어온다”고 말했다.

취업 청탁의 그늘은 극심한 취업 전쟁에서 승리한 뒤에야 나타나기 시작한다. 사람인 조사에 따르면 직장인 5명 중 4명(79.6%)이 ‘인맥을 통한 낙하산 인사’에 부정적이었다. 그 이유는 △다른 사람의 기회를 뺏기 때문(36.1%) △본인 실력으로 입사한 게 아니어서(23.0%) △다른 직원의 사기가 저하되기 때문(22.8%) 등이었다.

취업 청탁, 인턴 청탁의 만연은 결국 대부분의 구직자가 채용 과정의 불공정성을 의심하게 만들고 이어 ‘청탁 안 하면 나만 손해 볼지 모른다’는 인식의 악순환을 낳는다. 채용의 투명성과 객관성을 의심한 적이 있다는 구직자가 조사 대상의 82.1%에 이른다는 결과가 그 심각성을 보여준다.

부형권 기자 bookum90@donga.com

김희균 기자 foryou@donga.com

황장석 기자 suron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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