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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8년 10월 8일 02시 5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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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유가 90달러 아래로 떨어져도 자동차판매 급감
소비부진→ 생산활동 위축→ 실물경기 타격 현실화
한국도 부동산에 달려… 주요국 “금리인하” 목소리
세계 경제를 짓누르던 괴물의 얼굴이 갑자기 인플레이션에서 디플레이션(경기 침체 속 물가 하락)으로 바뀌었다. 불과 석 달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미국발(發) 금융위기의 폭발로 자산 가격 폭락이 현실화하고 실물경기 침체가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
1930년대 미국 대공황과 일본의 잃어버린 10년에서 보듯 인플레이션보다는 디플레이션의 폐해가 훨씬 크고 정책 대응이 어렵다.
미국의 존 버뱅크 패스포트캐피털 회장은 6일(현지 시간) “미국 경제가 매우 빠른 속도로 인플레이션 위기 폭발 국면으로 진입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코메르츠방크 조에르그 크래머 수석 이코노미스트도 최근 “앞으로 몇 달 안에 디플레이션이란 이름의 유령이 옷장에서 기어 나올 수 있다”고 말했다.
자산 가치 하락에 따른 디플레이션 조짐은 이미 선진국에서 나타나고 있다. 미국 뉴욕 증시의 다우존스산업평균지수는 올해 초보다 25%가량 폭락했다. 중국 상하이종합지수는 이 기간에 무려 59%나 폭락해 절반 이하로 떨어졌다.
주택 가격도 가파르게 하락하고 있다. 미국 주요 도시 20곳의 집값(7월 말 기준)은 1년 전보다 16.3% 급락했다. 유럽도 예외가 아니어서 올 2분기(4∼6월) 영국의 평균 집값은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9.77% 떨어졌고, 아일랜드는 13.92% 급락했다.
자산 가치 하락은 금융기관에 내놓은 담보물 가치를 떨어뜨린다. 이는 은행 부실을 가져와 금융위기를 불러온다. 미국에서 진행된 금융위기와 똑같은 구조의 위기가 재발하는 셈.
자산 가치가 하락하면 개인은 소비를 줄인다. 재산이 줄어들었다고 생각하게 돼 지갑을 닫는 것. 미국에선 최근 자동차 판매량이 급감했다. 미국 자동차시장 조사업체인 오토데이터코프에 따르면 9월 미국에서 판매된 자동차는 96만4873대로 1993년 2월 이후 15년 7개월여 만에 처음으로 100만 대 밑으로 떨어졌다.
소비 부진은 기업들의 생산 활동을 위축시켜 실물 경제에 타격을 준다. 미국의 8월 공장주문은 전월 대비 4% 떨어지며 2년 만에 가장 큰 하락폭을 보였고 미국공급관리협회(ISM)가 발표한 9월 제조업지수는 43.5로 전달(49.1)보다 크게 떨어졌다. 이는 9·11테러 이후 월간 최대 하락폭이다.
경기 침체 우려로 주요 상품 가격도 하락했다. 7월 배럴당 150달러에 육박했던 미국 서부 텍사스산 원유(WTI)는 6일(현지 시간) 87달러 수준으로 급락했다. 19개 주요 원자재 가격 동향을 나타내는 ‘로이터·제프리 CRB 지수’도 지난 한 주간 10.4% 하락해 1956년 이후 최대 하락폭을 기록했다.
디플레이션 현실화 우려가 커지자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와 유럽중앙은행(ECB) 등 세계의 주요 중앙은행들이 금리를 동시에 인하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한국은 미국 등 선진국에 비해 집값 하락 폭이 작아 디플레이션 현실화에 대한 우려가 높진 않다. 한국의 올 2분기 부동산 가격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평균 0.58% 떨어져 18% 넘게 떨어진 미국에 비하면 하락률이 미미하다.
하지만 올해 들어 매달 소폭이나마 상승했던 서울 집값이 8월과 9월에는 각각 0.01%, 0.09% 하락하는 등 집값이 전보다 더 크게 하락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서울 강남 등 이른바 ‘버블세븐’ 지역의 대형 아파트 값 하락 추세도 두드러졌다. 여기에다 내수와 수출이 동시에 침체돼 경제성장률이 크게 떨어지고 다시 자산 가격이 떨어지는 악순환에 빠지면 디플레이션의 함정에 빠질 수 있다.
한국경제연구원 배상근 연구위원은 “한국은 자산에서 차지하는 부동산의 비중이 80∼90%로 절대적으로 높기 때문에 향후 부동산 가격 급락과 실물경제 침체가 겹치면 디플레이션이 일어날 개연성이 충분하다”고 말했다.
이태훈 기자 jefflee@donga.com
이지연 기자 chanc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