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금융위기 비웃던 남미 ‘발등의 불’

  • 입력 2008년 10월 4일 03시 00분


10여년 脫美 자신감… “미국의 불행은 나의 행복”

美하원 부결뒤 투자금 회수 - 증시 급락에 발동동

미국발 금융위기의 공포가 막 시작될 때만 해도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 브라질 대통령은 심드렁했다. 오히려 미국의 불행을 고소해하는 눈치였다. 지난달 금융위기에 대한 질문을 받자 “무슨 위기?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에게나 물어보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러나 지난달 29일 미 하원에서 구제금융법안이 부결되자 룰라 대통령의 표정이 싹 달라졌다. 그는 최근 국영라디오 연설에서 “확산되는 금융위기에서 브라질도 결코 자유롭지 않다”며 “미국의 위기는 세계 모든 국가의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지난달 말까지 남미 ‘반미좌파’의 선봉장인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의 얼굴에선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리먼브러더스가 파산하고 모두가 미국을 쳐다보던 지난달 말 그는 미국 대신 중국으로 향했다.

그는 “베이징이 뉴욕보다 훨씬 우리와 관계가 있다”며 “우리는 죽음으로 치닫는 마차(미국)에서 벗어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던 그도 미국 주식시장이 곤두박질치고 남미 증시도 비틀거리자 지난달 30일 “금융위기는 허리케인 100개의 위력을 갖고 있다”며 우려를 나타냈다.

미국의 위기를 ‘강 건너 불구경’으로 여기면서 ‘남의 불행은 나의 행복’이라며 웃던 남미 국가들의 표정이 다시 두려움으로 바뀌고 있다고 뉴욕타임스가 3일 전했다. 미국의 위기가 역설적으로 미국의 힘을 이들에게 보여 준 셈이다.

전통적으로 ‘미국의 뒷마당’으로 인식되던 남미 국가들은 지난 10여 년간 미국에 대한 정치 경제적 의존도를 줄이기 위해 노력해 왔다. 유가상승과 경제성장을 바탕으로 부를 축적하기 시작하면서 ‘탈(脫)미국’에 대한 자신감도 넘쳤다.

지난달 베네수엘라와 볼리비아가 미국 대사들을 추방했을 때만 해도 미국에 대한 악담이 남미에 퍼졌다.

이런 반미 정서는 워싱턴의 신자유주의에 따른 남미 경제정책 처방으로 고통을 겪던 과거의 반감에서 비롯된 것. 월가가 무너지자 남미 지도자들은 과거 경제위기를 떠올리며 원수를 갚았다는 느낌을 가질 정도였다.

네스토르 키르치네르 전 아르헨티나 대통령은 “우리가 도달하려고 애쓰던 메카, 제1세계가 거품처럼 터지고 있다”며 고소해했다.

하지만 금융위기가 월가를 넘어 세계로 번지자 남미 국가들도 울어야 할 처지가 됐다. 금융위기 속에 투자자들이 이머징 마켓에서 돈을 빼냈다. 증시도 급락하기 시작했다.

브라질 헤알화는 지난달 달러에 대해 16% 떨어졌다. 급격한 침체를 막기 위해 국가개발은행에 25억 달러의 신용확대를 요청해야 했다.

멕시코는 미국에 사는 교포의 송금이 말라가 올해만 8%인 28억 달러가 감소했다.

베네수엘라에서는 채권 가치가 급락하고 주가가 폭락했다. 미국의 원유 수입이 급감하고 경제위기로 유가가 더 떨어질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 리먼브러더스 관련 투자로 3억 달러의 손실도 봤다.

볼리비아와 에콰도르도 주가 하락과 인플레이션으로 성장이 정체되고 있다. 아르헨티나는 주요 수출품인 콩 가격이 하락하면서 위기가 찾아왔다. 또 심각한 인플레이션을 잡지 못하면 또다시 금융위기에 들어갈 것이란 경고도 나오고 있다.

이들에게 기댈 것은 새로운 수출시장인 중국. 하지만 금융위기가 실물위기로 확산되는 지금 중국의 운명도 알 수 없는 상태다.

알프레도 코티노 무디스 선임이코노미스트는 “자원 수출에 기대는 라틴아메리카 경제는 신용경색과 유동성 부족에 큰 타격을 받기 마련”이라고 말했다.



김재영 기자 redfoo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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