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권영준/官治금융이 카드위기 키웠다

  • 입력 2003년 11월 24일 18시 21분


회원 수 기준 국내 1위의 카드업체인 LG카드사가 눈덩이처럼 불어난 적자로 부도 직전까지 내몰리다 마침내 지난 주말 사흘간 현금서비스가 완전 중단되는 사태까지 빚어졌다. 금융대란을 우려한 재정경제부와 금융감독위원회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채권단이 2조원의 신규자금 지원과 기존 채권을 만기 연장해 주는 것으로 일단 위기는 넘겼다.

▼뒷전으로 밀린 자율구조조정 ▼

그러나 이번 지원을 통해 사태가 근본적으로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전문가는 매우 드물다. 채권단과 LG그룹 지배주주의 협상 과정에서 그룹 총수 일가의 연대보증 여부 등을 둘러싸고 밀고 당기기를 했다는 사실 자체가 양측 모두 최악의 시나리오를 염두에 두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번 사태를 통해 우리는 금융정책 및 감독 당국인 재경부와 금감위의 정책 인식과 감독 자세에 대해 허탈함을 넘어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이들은 소를 잃고도 외양간조차 고치지 않는 무책임을 다시 한번 드러냈기 때문이다.

우리는 금융감독 당국이 거의 전 금융기관을 동원해 5조원이 넘는 유동성을 지원했던 4·3조치 당시 시장의 비판을 무마하기 위해 “카드사 유동성 지원조치는 이번이 마지막이고 이제는 시장에 의한 자율구조조정만 남았다”고 약속했던 것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정부는 그 약속을 지키지 않고, 온갖 무리수를 동원하면서까지 카드사의 구조조정을 지연시켰다.

정부는 4·3조치 이후 발표한 ‘신용카드사 수지 및 손실흡수능력 전망’이라는 보고서에서 카드사들이 상반기에는 2조1000억원의 적자를 기록하겠지만 하반기에는 1조9000억원의 흑자로 돌아설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 전망이 어긋나고 카드 연체율이 늘어나자 적기 시정 조치 기준에서 연체율을 제외해 주는 반시장적 조치를 취했던 것이다.

이미 구조조정의 시기를 놓친 LG카드의 경우 내년 상반기까지 경영이 정상화되지 않으면 20조원이 넘는 차입금으로 인해 LG그룹은 물론 우리 금융시장에 핵폭탄이 될 우려가 매우 크다. 더욱 큰 문제는 시장에서는 모두가 이런 사태가 일어날 것을 예견했는데도 불구하고 정작 감독 당국은 별일 없을 것이라고 큰소리치고 있었다는 데에 있다. 그러다가 사태가 크게 불거지자 감독 당국은 입버릇처럼 외치던 시장 메커니즘에 의한 자율구조조정은 뒷전으로 하고 또다시 관치금융이라는 전가의 보도를 휘두르고 있는 것이다.

지금 선진국 경제가 상승세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경제는 아직 회복세를 보이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인 소비침체는 바로 카드사가 유발한 신용불량자 문제와 무관하지 않다. 여기서 문제는 관치금융에 길들여진 시장이 구조조정을 통해 스스로 정상적으로 작동해 기능을 복원할 수 있는 힘을 잃고 있다는 것이다.

이번 카드사 사태를 통해 노무현 대통령은 아직도 척결하지 못한 관치금융과 재벌금융에서 오는 다음과 같은 폐해를 뼈저리게 깨달아야 한다.

▼反시장적 땜질처방 재앙 불러 ▼

첫째,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사태 이후 소위 소비진작을 통한 경기부양의 목적으로 카드업을 양성해 온 정책목표가 결국 재벌의 무분별한 외형 경쟁을 불러와 건실하던 카드업을 완전히 부실덩어리로 전락시켰다. 둘째, 소위 규제완화라는 미명 아래 현금서비스 한도 철폐와 위험관리 없는 마구잡이식 마케팅에 대한 감독 부재가 오늘날 360만명이라는 엄청난 신용불량자를 양산했다. 셋째, 관(官)은 치(治)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그릇된 관치의식이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보다는 소위 ‘덮고, 미루고, 섞고’의 ‘3고’식 땜질처방을 유발해 문제를 더욱 악화시켰다. 넷째, 관치금융의 여파가 곳곳에 산재한 투신업과 맞물려 카드사 문제는 금융시장 전체로 불신의 바이러스를 전염시켜 천문학적 규모의 부동자금이 생산자금으로 넘어가지 못하게 하고 있다.

미국의 신경제를 이끌었던 제임스 루빈 전 재무장관은 시장이 무서워서 말을 조심했다고 한다. 외환위기를 당하고서도 시장을 우습게 아는 우리의 관치가 카드사 문제를 얼마나 더 키울지 심히 걱정스럽다.

권영준 경희대 교수·경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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