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소기업 해외 엑소더스 실태]"임금 싼곳으로…"

  • 입력 2003년 9월 15일 18시 09분


코멘트
《올 3월 서울 아셈센터에서 열린 중국투자설명회에는 400여명의 중소기업인이 몰렸다. 몇 년 전만 하더라도 해외투자설명회는 참석자가 많아야 50명을 넘지 않았다. 요즘은 수백명이 기본이고 업종도 다양하다. 기업이 생산비용 절감이나 해외시장 개척에 유리한 지역으로 생산기지를 이전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 유럽 미국 일본의 중소기업이 먼저 이 길을 걸었다. 그러나 한국은 국내 산업의 고(高)부가가치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채 생산설비가 통째로 해외로 옮겨가는 경우가 많고 해외이전 속도도 너무 빠르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부작용도 그만큼 크다.》

▽중소기업 ‘엑소더스’=중소기업의 해외투자가 시작된 것은 1980년대 말부터. 노동집약업종인 봉제 가발 가방 완구업체들이 가장 먼저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지로 진출했다.

해외투자의 본격적인 신호탄이 울린 것은 중국과 수교(1992년)한 직후인 94년부터이다. 94년 한해 해외투자 신고건수가 1551건으로 93년(848건)보다 2배 가까이 늘었다. 투자액도 93년 5억5900만달러에서 94년에는 8억9500만달러로 껑충 뛰었다.

클릭하면 큰 이미지를 볼 수 있습니다.

현재까지도 중소기업의 해외투자는 중국이 압도적으로 많다. 한국과 가까운 칭다오(靑島) 톈진(天津)지역에 2500개, 다롄(大連)에 1000개, 상하이(上海)에는 300여개 업체가 입주해있다.

KOTRA 상하이무역관 박한진 과장은 “한중수교 이후 신발 완구 봉제 의류기업들이 물밀듯이 들어오더니 요즘에는 전기전자 기계 건설업종으로 확대되고 있다”며 “90년대 초반 부산신발공단, 대구섬유공단, 수도권의 봉제 완구 가방공단이 중국으로 통째 옮겨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국내산업 후유증=생산시설 전체가 해외로 옮겨가는 형태의 해외 이전은 국내 산업에 심각한 후유증을 남겼다.

1980년대 말 전 세계 수출 1위 업종이던 신발산업은 금년 들어 26년 만에 처음으로 무역수지적자 업종으로 전락했다. 올 1·4분기 신발 수입(1억3254만달러)이 수출(1억1918만달러)을 넘어섰다.

완구업종과 가방업체 역시 생산시설을 해외로 앞 다투어 옮기는 전략을 선택하면서 산업 자체가 전멸한 상태.

섬유산업 역시 서서히 몰락의 길을 걷고 있다. 섬유산업은 지난 10년간의 국내투자는 별로 없고 해외투자만 23억달러에 이른다. 1997년 41만명에 이르던 근로자도 2002년에는 35만명으로 줄었다. 1년에 평균 1만개의 일자리가 없어진 셈. 신발과 섬유가 주력이었던 부산과 대구지역은 10년째 불황을 겪고 있다.

이에 반해 대기업 주도로 해외 이전이 활발하게 이루어진 가전업종은 무역흑자가 98년 60억달러에서 2002년에는 77억달러로 오히려 늘었다. 오디오나 백색가전 등 생산성이 떨어지는 부분은 중국 태국 멕시코 등지로 이전하고 국내 본사는 디지털TV 등 고부가가치 제품개발에 치중하는 등 생산시설의 해외 이전을 전략적으로 추진한 결과이다.

▽준비 없는 해외진출=대한상공회의소 조사(2002년)에 따르면 중국에 진출한 기업의 87.2%가 ‘신중하게 검토한 후 진출하라’고 답했다. 중소기업의 해외 진출이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현지에 대한 자세한 정보도 없이 급하게 해외로 진출한 ‘양떼형’ 기업, 고급기술에 대한 도전을 포기하고 인건비가 싼 지역으로 계속 옮겨 다니는 ‘떠돌이형’ 기업은 실패하기 쉽다.

1997년 중국에 자전거 경음기 생산공장을 세운 I사는 2년 만에 손을 털고 나와야 했다. “직원의 병원비를 회사에서 물어줘야 하는 등 한국에선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경비가 많이 발생해 생산비용이 급격하게 올라갔다”는 게 회사관계자의 설명. 외상거래가 많은 중국시장의 특성 때문에 자금 압박에 시달리기도 했다. 이 회사는 결국 고철값에 공장을 넘기고 철수했다.

인도네시아에 진출한 상당수 중소기업도 베트남이나 방글라데시로 생산시설을 옮기고 있다. 지난해 인도네시아 정부가 최저 임금을 60% 올리는 바람에 경영여건이 갑자기 악화됐기 때문이다. 싼 인건비만 보고 현지에 진출했다가 다시 공장을 옮겨야 하는 상황에 빠진 것.

대한상의 백남홍 중소기업위원장(을지전기 대표)은 “해외 진출 중소기업의 30%가 5년 이내에 도산하거나 귀국할 것”이라고 단언했다.

▽무엇이 문제인가=전문가들은 중소기업의 급격한 생산시설 해외 이전이 부작용을 많이 수반한 이유로 우선 경제주체들의 경험 및 노하우 부족을 꼽았다.

삼성경제연구소 김재윤 박사는 “일본은 1980년대 말 엔고(円高) 때문에 중소기업의 해외이전이 가속화됐지만 정부 학계 선도기업들 간에 ‘생산성이 떨어지는 부분만 해외로 이전하고 본사는 고부가가치 기술에 집중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고 설명했다.

그 결과 일본은 산업공동화(空洞化)를 최소화하면서 기업의 경쟁력은 높이는 데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한국은 달랐다. 기업인들은 기술개발이나 마케팅에 집중하기보다 우르르 몰려나가는 방식을 택했다. 구조조정의 비전을 제시해야 할 정부 및 학계도 그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 정부의 산업정책은 항상 미래 성장산업에 집중됐고 신발 섬유 완구 등 노동집약적인 업종들은 사양(斜陽)산업으로 간주해 포기를 당연시했다. 중소기업간의 합병촉진, 공동기술 개발이나 브랜드 개발, 성공 및 실패사례의 분석 및 경험 공유 등 중소기업의 구조조정을 매끄럽게 진행할 제도나 관행 구축에 실패했다. (무역연구소 동북아팀 양평섭 연구위원)

산업연구원 김홍석 박사는 “중소기업의 해외 이전이 고부가가치 업종으로 확산되고 있는 만큼 경제주체들이 지난 10년간의 생산시설 해외 이전을 통한 구조조정의 성공과 실패 사례를 찬찬히 뒤돌아보고 지혜를 모아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이병기기자 eye@donga.com

김두영기자 nirvana1@donga.com

홍석민기자 smhong@donga.com

▼성공한 기업 경영비법 ▼

선수용 사이클 신발 세계시장 점유율 40%를 차지하는 ㈜우연은 국내와 해외공장에서 생산하는 품목이 다르다. 경남 김해에 있는 공장에선 탄소섬유를 가공해 만드는 신발 밑창 등 높은 기술이 필요한 부품을 생산하고 나머지 일반부품 생산과 완제품 조립은 중국에서 하고 있다.

나이키에 신발을 납품하는 태광실업과 세원은 각각 베트남과 중국에 생산기지를 두고 있다. 두 회사는 국내 본사에선 기획과 신제품 개발 등을 맡고 생산은 전적으로 해외에서 하는 식으로 운영하고 있다.

신발업계에서 성공사례로 꼽히는 업체들은 이처럼 본사와 해외 생산기지가 역할을 분담한다는 점과 안정적인 수요처를 갖고 있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특수화를 만들거나 세계적인 브랜드를 가진 업체에 납품하는 경우다. 우연 정철상 사장은 “해외투자도 리스크가 많기 때문에 판매가 안정적으로 이뤄지지 않으면 낮은 인건비를 무기로 저가상품을 만들어도 살아남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봉제완구를 생산하는 오로라월드는 원가를 낮추기 위해 생산기지를 해외로 돌리는 한편 본사에선 디자인 개발에 힘을 쏟아 성공한 사례. 이 회사는 3원화된 경영을 하고 있다.

서울 본사에선 제품 기획과 샘플 제작, 마케팅 전략을 수립하고 생산은 중국과 인도네시아에서 맡는다. 미국 영국 홍콩의 현지법인에선 판매와 시장조사 등 구체적인 마케팅작업을 벌인다.

옥윤창 마케팅 팀장은 “제품 디자인을 고급화해 다른 제품과의 차별화를 시도한 것이 성공 비결”이라고 설명했다. 본사 직원 가운데 40%가 디자이너일 정도로 제품디자인에 많은 투자를 하고 있다.

92년 베트남으로 옮겨간 의류업체 정민통상은 진출 10년 만에 종업원 1000명에 매년 200만벌을 생산하는 규모로 성장했다. 민용식 사장은 “낮은 인건비에 만족하지 않고 품질향상에 주력해 시장을 뚫었다”고 설명했다. 이 회사의 인건비 비중은 20%가 채 안 된다. 모든 원부자재를 동남아시아가 아닌 한국에서 조달해 품질을 높였다. 이와 함께 스키복과 스노보드복, 방화복 등 특수복 분야에 특화한 전략이 주효했다.

민 사장은 “90년대 후반 이후 낮은 인건비만 보고 베트남을 찾는 한국 중소기업이 크게 늘었다”며 “충분한 사전 조사와 치밀한 전략이 없으면 실패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지적했다.

생산기지를 해외로 이전해 성공한 한국 중소기업인들의 충고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이렇다.

“낮은 인건비만 보고 해외에 진출해서는 살아남기 어렵다.”

홍석민기자 smhong@donga.com

김두영기자 nirvana1@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