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단소송법안 법사위 통과]소송만 당해도 기업주가 폭락

  • 입력 2003년 7월 23일 18시 3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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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권관련 집단소송법안이 여야합의로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법안 심사소위원회를 통과함에 따라 약 3년간에 걸친 논란이 마침표를 찍었다.

일단 집단소송에 걸리면 기업의 생사(生死)가 좌우될 가능성이 크므로 기업으로서는 대책을 마련하는 일이 ‘발등의 불’로 떨어졌다. 자산규모 2조원 이상으로 소송대상이 되는 공개기업 수는 현재 80개.

▽왜 도입됐나=분식회계 주가조작 허위공시의 폐해가 워낙 컸기 때문이다.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 종합상사, 해외건설 등을 통해 고속 성장해온 대기업들 중에는 아직도 회계분식(粉飾)이 남아 있는 기업이 상당수 있다. SK글로벌 사건도 수십년간의 분식을 떨어내는 과정에서 불거져나온 것. 또한 코스닥 등록기업을 비롯한 중소기업들은 주가조작, 허위공시 등에 취약하다.

이 같은 ‘경영 불투명’은 기업과 국가경제의 신인도를 끌어내렸을 뿐 아니라 소액주주에게 엄청난 손해를 끼쳤으며 자본시장의 발전에도 걸림돌이 됐다.

▽엄청난 위력=집단소송제는 현재 시행되고 있는 주주대표소송이나 선정당사자제도에 비해 기업에 훨씬 위협적이다. 주주대표소송제는 소송을 제기한 주주가 승소를 하더라도 이익이 주주 개인이 아닌 회사에 돌아가기 때문에 유인(誘因)이 별로 없다.

선정당사자제도와 집단소송제는 일부 주주가 다른 주주들을 대표해 손해배상청구소송을 하는 점에서는 같지만 소송주체가 되는 방식은 정반대다. 선정당사자제도에서는 피해자들이 참가하겠다는 의사표시를 해야 소송권을 위임받는다. 이에 비해 집단소송제는 피해자들이 불참 의사표시(제외신청)를 하지 않으면 자동으로 소송권한을 위임받는다. 선정당사자제도에서는 상당한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대표소송을 제기할 수 있지만 집단소송제에서는 쉽게 소송을 낼 수 있는 것.

미국 등의 사례를 보면 소송을 제기당하는 즉시 주가가 폭락하는 피해를 본 것으로 보인다. 스탠퍼드대에 따르면 미국에서는 지난해 224개 기업이 주가하락과 관련해 집단소송을 제기당했고 이로 인해 소송기간 중 시가총액이 줄어든 규모가 모두 1조9000억달러에 이른다.

▽남소방지책은 강화=집단소송제의 위력이 큰 점을 감안해 법사위소위는 정부가 당초 국회에 낸 안에 비해 소송 남발을 막을 수 있는 장치들을 많이 추가했다.

소위안은 무분별한 소송을 방지하기 위해 소송자격을 50인 이상으로 하고, 이들 소송인이 피고회사의 전체 주식 1만분의 1 이상이나 주식 시가총액 1억원 이상을 보유토록 제한했다. 따라서 발행주식이 많은 거대기업의 경우 소송을 제기하기가 쉽지 않게 됐다.

법원이 소송을 허가할 때 금융감독기관의 기초조사 자료를 제출받는 등 직권조사를 할 수 있도록 한 점도 남소방지 효과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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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광암기자 iam@donga.com

박중현기자 sanjuck@donga.com

▼재계 “소송남발 우려…기업엔 核폭탄”▼

“기업에 핵폭탄 같은 파괴력을 가진 제도다.”(전국경제인연합회 신종익 상무)

증권집단소송제 도입은 올해 초부터 이미 예상되어 온 일이다. 그러나 정작 법안이 국회 법사위를 통과하자 기업들과 경제단체들은 긴장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기업 관계자들은 “주가조작, 허위공시, 분식회계 등 집단소송제의 대상이 되는 행위들은 기업으로서는 당연히 하지 말아야 할 일”이라는 점은 인정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나아가 집단소송제는 원고가 승소하면 기업은 문을 닫을 정도로 엄청난 액수를 배상해야 한다. 신 상무는 “금융감독원에서 검찰에 고발한 사건 중 30%가 무혐의 처리되는 등 금융사건은 객관적 입증이 어렵다”면서 “그렇지만 한국 상황에서는 일단 소송이 제기되면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그 기업은 치명타를 입기 때문에 남소(濫訴) 방지 장치가 더 강화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금융감독기관의 전심(前審) 조항이나 소송 전에 원고측에서 공탁금을 맡기는 등 남소 방지를 위한 장치를 제외해 기업에 타격이 클 것”이라고 비판했다.

반면 집단소송제 조기 도입을 주장해온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는 오히려 “남소 방지라는 명목으로 아예 소송을 제기할 수 없을 정도의 조건을 만들었다”고 비판했다.

참여연대 경제개혁센터 김상조(金尙祚·한성대 교수) 소장은 “3년간 3건 이상 집단소송 대리인으로 활동한 사람(법무법인 포함)은 소송대리인이 될 수 없고, 과거 1년 동안 해당 회사의 주식을 취득한 일도 없어야 한다는 것은 사실상 소를 제기할 수 없게 만든 조건”이라며 “몇 년이 지나도 소송 한 건 제기하기 어렵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법개정이 불가피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신연수기자 ysshin@donga.com

▼美, 訴남발 방지장치 마련 日, 부작용우려 유보▼

증권집단소송제는 미국에서 정립된 제도이다. 영국 캐나다 호주 등 ‘영미법 체제’인 나라들이 증권 소비자 환경 등의 분야에서 폭넓게 시행하고 있다.

이에 비해 대륙법 체제를 따르는 독일과 프랑스는 증권관련 집단소송을 부분적으로 인정하되 소송주체를 법률이 정한 단체로 제한하고 공익성 소송으로 범위를 한정하고 있다.

일본은 1990년과 1999년 두 차례에 걸쳐 증권집단소송제도를 검토했으나 ‘소송 당사자 주의’에 어긋나며 피해액과 피해자 확정이 어렵다는 이유로 도입을 유보한 상태. 최근에는 중국 브라질 러시아 등 신흥시장 국가들이 증시 활성화 방안의 하나로 증권집단소송제 도입을 검토하고 있다.

미국은 1938년부터 증권법, 증권거래법 등을 통해 증권관련 집단소송제를 시행해오다 90년대 들어 ‘남소(濫訴) 현상’이 두드러져 기업활동을 제약한다는 지적이 제기되자 95년, 98년, 2002년 세 차례에 걸쳐 손해배상액과 한 원고의 소송횟수를 제한하는 법을 제정했다.

또 남소를 막기 위해 피고의 소송공탁금 명령 요구권을 인정하고 있다.

많은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와 미국 의회는 증권소송이 연방증권 거래법의 목적을 실현하고 ‘증권사기’를 억제하는 데 큰 효과가 있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김주영(金柱永) 좋은기업지배구조 연구소장은 “미국의 자본시장이 전 세계적으로 가장 발달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증권 집단소송제도를 통해 투명성과 공정성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라며 “최근의 비판적 논의도 제도의 존폐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더 효율적인 소송제도를 찾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박중현기자 sanjuc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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