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납품가 내려… 세일 몰라…" '甲인 기업들' 주가도 든든

  • 입력 2002년 12월 15일 18시 37분



“우리는 늘 큰소리치고 산다.”

한국 사회에서는 주도적인 위치냐, 수동적인 위치냐에 따라 사람이나 기업을 ‘갑(甲)’과 ‘을(乙)’로 나누는 일이 잦다. 주도적인 위치에 있으면 ‘갑’, 반대로 갑이 하자는 대로 따라할 수밖에 없는 위치이면 ‘을’이다.

삼성전자처럼 ‘누구를 납품업체로 선정할까’ 결정할 권리가 있는 회사는 당연히 갑이다. 반대로 삼성전자가 납품을 거절하면 회사 전체가 휘청대는 부품 납품업체는 을일 수밖에 없다.

중요한 것은 갑인 회사일수록 투자하기에도 안전하다는 점. 갑은 주도적 위치를 이용해 이익이나 매출을 조절할 수 있어 실적이 안정적이라는 장점이 있다.

▽갑(甲)인 기업〓현대백화점 같은 고급 백화점은 물건을 대려는 회사에 대해 언제나 갑이다.

백화점에 입점하는 의류업체는 매출의 30% 이상을 수수료로 내야 한다. 그러나 이 수수료가 아까워 입점을 거절하는 회사는 없다.

특히 옷이나 화장품을 만드는 회사는 백화점에 자리를 못 잡으면 싸구려 취급을 받기 일쑤다. 한 의류회사 임원은 “백화점 직원이 쓰는 슬리퍼 값까지 전부 우리가 내야 한다”며 “그러나 백화점이 갑이기 때문에 할 수 없다”고 푸념한다.

할인점 시장 최강자 이마트(신세계)도 제조업체에 대해 단연 갑이다.

국내에서 가장 많은 점포 수를 자랑하는 이마트는 물건을 한번 계약할 때 그 규모가 엄청나게 크다.

이마트는 한꺼번에 많이 산다는 점을 내세워 훨씬 싼 가격에 물건을 공급받는다. 제조업체가 싸게 팔기 싫다고 버티면? 그 회사 물건을 안 사면 된다. 아쉬운 쪽은 물건 못 파는 제조업체이지 이마트가 아니다.

고객에게도 갑 행세를 하는 회사가 있다. 숙녀복을 만드는 타임은 막강한 브랜드를 앞세워 1년 내내 단 한 번도 세일을 하지 않는다. ‘비싸서 우리 제품 사기 싫으면 다른 옷 사 입으세요’ 식의 태도다. 그러나 세일을 하지 않고도 타임은 막강한 브랜드를 앞세워 매분기 10∼20%씩 영업이익을 늘리고 있다.

▽을(乙)인 기업〓 굿모닝신한증권 박효진 연구원은 “한국 코스닥 기업 중 상당수가 삼성전자 SK텔레콤 KT 등 세 대기업에 목숨을 맡긴 상황”이라고 말했다.

회사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고 대기업 눈치만 봐야 하는 처지라면 절대 장기적인 성장을 장담할 수 없다. 당연히 투자자도 이런 회사에 장기투자해서는 안 된다.

스스로 실력으로 시장을 장악한 게 아니라 정부가 독점을 보장해 준 회사도 을일 가능성이 높다. 국내 단 하나뿐인 내국인 전용 카지노 회사인 강원랜드가 대표적인 예. 이 회사는 정부가 “너희들 올해 돈 너무 많이 벌었어. 내년부터 이익 좀 줄여”라고 명령하면 당장 이익을 줄여야 한다.

대학투자저널 최준철 발행인은 “‘주도권’은 장부에 나와있는 어떤 자산보다 가치가 있는 중요한 무형자산”이라며 “갑의 위치를 차지하는 기업은 투자자에게도 안정적인 수익을 안겨 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이완배기자 roryrer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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