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입력 2002년 11월 20일 16시 54분
공유하기
글자크기 설정
#보졸레 누보, 아는 만큼 보여요
“지난해 이맘때였어요. 친구들이 ‘보졸레 누보’ 이야기를 많이 해서 맛을 봤어요. 달콤한 맛을 기대했는데 텁텁하고 쓴맛이 느껴지더군요. 잔을 내려놓고 말았죠.”
앉은자리에서 소주 한 병을 거뜬히 해치우는 애주가(愛酒家) 황씨. 달콤함을 기대했던 그의 와인 ‘외도(外道)’는 쓴 기억이 됐다. 화이트 와인에 길들여진 탓이었다.
“올해는 다를 거예요. 와인 보는 눈이 높아졌거든요. 보졸레 누보는 올해 나온 프랑스 와인 맛을 점쳐볼 수 있는 리트머스 시험지입니다.”
와인은 포도 품종, 토양, 기후, 양조자 등에 따라 맛이 달라진다. 보졸레 누보는 프랑스 보졸레 지역에서 8, 9월에 수확한 포도로 담근 와인. 보졸레 지역의 가메이 포도 품종을 사용해 단기 숙성한 와인이어서 일반 레드와인보다 떫은 맛이 덜하다. 보졸레 누보는 타닌 성분이 적어 오래 두면 숙성되지 않고 맛을 잃는다. 구입 즉시 마시는 것이 좋다. 화이트 와인처럼 섭씨 10∼13도 정도에서 가장 맛있다. 보졸레 빌라주 누보는 보졸레 지역의 상품(上品) 포도로 만든 와인이다.
#‘화이트’에서 ‘레드’로
그는 와인에는 사실 문외한에 가까웠다. 대학을 졸업하고 병원에서 흰 가운을 입고 물리치료사로 일했고, 보수적인 분위기가 싫어 병원을 나와 이벤트 회사에서 일하는 동안에도 어쩌다 한 두잔 마셨을 뿐이다.
2년 전 우연한 기회에 위스키 바를 열었을 때만 해도 이렇게 와인에 매료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지난해 이맘때쯤이었나요. 롯데호텔에 다니던 한 손님이 소믈리에 과정을 다녀보라고 권했어요. 올해 1월부터 호기심 반 필요 반으로 종로의 와인 아카데미에 다녔죠.”
소믈리에 과정을 배우면서 위스키만 팔던 바에 와인이 점점 늘었다. 앞으로 와인의 구색을 맞춰나갈 생각이다.
“정말 아는 만큼 보이는가 봐요. 처음에는 화이트 와인을 즐겨 마셨는데 요즘은 깊은 맛이 우러나오는 레드 와인이 좋아요. 또 좋아하는 종류도 꽤 늘었어요.”
그의 말을 빌리면 위스키를 즐기는 손님은 술에 만취할 확률이 높지만 와인은 정반대다. 와인 덕분에 가게 분위기도 한결 부드러워졌다.
#초보자 와인 마시기
황씨가 겪은 와인 손님은 각양각색. 초보자일수록 가격만 보고 와인을 고르는 ‘실속파’나 한가지만 고집하는 ‘일편단심’ 손님이 많다. 또 잔에 와인을 가득 따라 물 마시듯 벌컥벌컥 마시는 ‘원샷파’ 손님도 있었다.
“모르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죠. 오히려 모르면서 아는 체하는 손님이 꼴불견이에요.”
와인을 주문할 때 소믈리에에게 도움을 청하면 적어도 ‘촌놈’ 소리는 피할 수 있다. ‘시지 않았으면 한다’ ‘달콤한 맛이 좋다’는 등 자신의 기호만 알려줘도 좋은 와인을 소개받을 수 있다.
“처음에는 화이트 와인부터 시작하는 게 무난하죠. 화이트 와인은 조금 차게 해서 마시는 것이 좋아요. 체온이 전달되지 않도록 잔의 몸통을 잡지 않는 것이 예의입니다.”
와인도 코스에 따라 즐긴다. 톡 쏘는 맛이 나는 스파클링 와인은 식전에 애피타이저로 즐긴다. 식사 중에 마시는 와인은 메인 요리와 궁합을 따져야 한다.
육류는 레드, 생선류는 화이트 와인이 어울린다는 것이 정설. 식사가 끝나면 디저트와 함께 달콤한 맛이 나는 와인으로 마무리한다.
황씨는 와인을 즐기는 손님이 많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래서 지금도 만취한 손님에게는 와인을 팔지 않는다. 술에 취하면 와인의 깊은 맛과 향을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소멀리에의 꿈
소멀리에는 식당이나 바에서 손님에게 와인을 설명해주는 ‘와인 바텐더’. 황씨는 소멀리에가 되려고 와인 아카데미에서 프랑스어부터 배웠다. 와인 관련 용어를 제대로 읽고 이해하기 위해서다. 그런 다음 비로소 와인 맛을 봤다. 소주 한잔을 마셔도 회사까지 가려내는 황씨지만 와인 앞에서는 맥을 못 췄다. 같은 와인을 여러 번 마셔도 맛과 향을 기억하지 못하는 일이 반복됐다. 오기가 생긴 황씨는 소멀리에 전문가 과정을 반복해서 두 번 수강했다.
“요즘 좋아하던 소주는 입에 대지도 않아요. 미각과 후각이 생명인 소멀리에에게 독한 술, 진한 커피, 담배 등은 치명적이죠.”
황씨는 요즘 와인 공부를 더 하려고 프랑스 유학을 생각하고 있다. 평생 와인과 벗하며 살기 위해서다.
박 용기자 parky@donga.com
박형준기자 love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