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류하는 국정 현안 下]예산안 심의 겉핥기

  • 입력 2002년 10월 15일 18시 32분


내년도 나라 살림살이를 위한 111조6580억원의 예산을 심의하는 국회 예산결산위원회 활동이 28일 시작된다.

그러나 올해는 대통령 선거 때문에 정기국회 폐회가 11월8일로 한달 가까이 앞당겨진 데다 한나라당의 의원 영입에 반발한 민주당의 국회 거부로 14일 오후부터 국회 본회의가 파행하기 시작해 예산심의가 순탄하게 이뤄질지 의문이다.

올해도 만성적인 인력부족 및 정부부처의 민원으로 예산심의가 겉핥기식으로 흐르고, 의원들의 지역구 챙기기로 나눠먹기식 예산 배정이 재연될 가능성이 크다는 지적이 높다.

▼글 싣는 순서 ▼

- 上 민생법안 처리 뒷전
- 中 선거개혁 물거너가나

▽주먹구구식 예산심의〓지난해 말 예결위는 지하철 분당선 연장선(서울 수서∼선릉)의 탄천역 추가설치 예산 50억원을 배정했다가 올해 슬그머니 ‘없었던 일’로 해버린 것은 주먹구구식 심의의 대표적인 사례다. 탄천역 신설이 불러올 문제점을 확인도 해보지 않고 한나라당 A의원이 요청한 이 예산을 배정했다가 공사기간이 1년 반가량 늘어난다며 경기 성남시 분당지역 주민이 반대하고 나서자 예산 배정을 취소한 것이다.

상임위에서 삭감한 예산안이 정부의 로비 등으로 예결위 심의과정에서 되살아나는 경우도 있다. 지난해 국방위는 국방부가 요청한 아파치헬기 등 7가지 무기 구입 예산 5000억원을 전액 삭감했다. 그러나 예결위 최종 심의과정에서 5000억원이 끼워넣기로 되살아났다. 이 예산 삭감을 주장했던 한나라당 박승국(朴承國) 의원은 14일 “예결위가 복잡한 계수조정 단계에서 특별한 이유도 없이 예산을 살려놓았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당시 파문이 커지자 국회는 부랴부랴 국회법을 개정해 ‘상임위에서 삭감한 예산안을 예결위가 증액할 때는 상임위의 사전동의를 얻어야 한다’는 조항을 신설했다.

이밖에도 사회간접자본(SOC) 예산은 의원들의 지역구 사업 끼워넣기로 인해 낭비가능성이 큰 항목으로 꼽힌다. 의원들이 건교위를 선호하는 것도 지역구 사업예산을 따낼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SOC 예산은 정부안보다 7410억원이 늘어 전체 예산 증가액 1조3959억원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국회의 예산기능 강화가 우선〓헌법상 예산편성권은 국회가 갖고 있지만 실제는 정부가 10개월간 편성하고, 국회가 2개월간 심의하는 식으로 운영되고 있다. 정부에선 수천명의 예산담당자가 한푼이라도 더 따내기 위해 머리를 싸매고 예산안을 짜지만 이를 견제할 국회 인력은 태부족이다. 의원들의 심의에 앞서 타당성을 검토해야 할 정당 소속 예결위 전문위원은 10명에 불과하다. 국회사무처 소속 예결위 전문위원 50명이 더 있지만 공무원 신분인 이들이 낸 예산검토 보고서는 중립성이 강조되는 바람에 판단근거로 삼기엔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게 정당과 시민단체의 지적이다.

경실련 이강원(李康源) 시민국장은 “현재의 예산심의 시스템으로 정부가 짜온 예산을 정교히 따지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하다”며 “예산심사 기능을 대폭 강화해 정부에의 종속을 막아야 한다”고 말했다.

한경대 이원희(李元熙·행정학) 교수는 “미국은 대통령 직속 예산관리국(OMB)보다 의회 산하의 의회예산처(CBO)와 의회조사국(CRS)이 예산관련 전문성이 높아 예산심의를 주도한다”며 국회에 제대로 된 예산심사기구를 설치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전문가들은 또 의원들의 청탁과 민원으로 막판 예산 나눠먹기식으로 운영되는 예결위 계수조정소위원회 심의과정을 완전 공개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주요 부문별 예산액 및 증가율
 2002년 예산 (원)2003년 예산안 (원)증가율(%)
총액109조6298억111조6580억1.9
사회복지9조9948억10조9210억9.3
교육22조5282억24조3739억8.2
과학기술4조9556억5조2583억6.1
사회간접자본(SOC)15조9860억16조7560억4.8
국방비16조3640억17조4064억6.4
인건비20조8254억22조6246억8.6

(수출 및 중소기업지원(-8.5%), 통일 외교(-16.8%)분야는 줄어들었음.)

(자료:기획예산처)


김승련기자 srkim@donga.com

박민혁기자 mhpark@donga.com

▼정창수(鄭昌洙) 시민행동 예산감시국 팀장▼

정창수 팀장

예산 심의 및 결산은 국민이 낸 세금에 대한 감시를 위임받은 국회가 하는 큰 일 가운데 하나다.

1999년부터 4년간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활동을 방청하고, 속기록을 챙겨보면서 느낀 점은 예산심의가 부실하게 이뤄지고 있다는 점이다. 예결위원들은 자주 자리를 비웠고 예산 심의보다는 정치공세에 치중하는 경우가 잦았다.

또 예산 심의과정이 투명하지 못한 것도 큰 문제로 여겨졌다. 국회 예결위는 예산안조정소위원회를 두고 있다. 정당간 이견을 조정하고 예산의 최종안을 확정하는 곳이다.

그런데 이 소위원회는 비공개로 진행된다. 시민단체나 언론 그 누구도 회의를 방청할 수 없다. 여론에 떼밀려 2001년도부터 공개하기로 했지만 국회는 소위원회 내에 또 다른 소위원회를 만들어 비공개로 진행하고 있다.

결국 50여명의 예결위원 가운데 6∼8명만이 100조원이 넘는 국민의 혈세를 최종적으로 심의하는 셈이다. 여론의 비난대로 여야간에 사업별 예산 주고받기식 예산결정이 이뤄지는 것을 목격했다.

예결위는 “소위원회의 비공개는 관행이자 국회의 고유권한” “공개시 이익단체의 로비가 우려된다”는 이유로 비공개를 합리화한다.

회의내용이 공개될 경우 소속 의원이 직면하게 될 압력단체의 부담은 인정한다.

하지만 국민의 대표기관으로서 개개인이 헌법기관인 의원이 이익단체의 로비, 안면있는 공직자의 체면, 동료의원의 지역구 사정 등에 좌우돼 예산심사를 적당히 한다는 사실을 납세자인 국민은 알아야 한다.

156조원대 공적자금의 허술한 쓰임새로 나라가 시끄럽다. 하지만 국회 예결위가 매년 비슷한 규모의 예산을 심사하고, 결산하는 과정에서 공적자금의 경우보다 엄밀하게 일처리한다고 생각하는 국민은 많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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