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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1년 12월 12일 18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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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재계에 전례가 없는 SK그룹의 ‘투톱(Two Top) 체제’는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
98년 최종현(崔鍾賢) 전 회장이 작고한 뒤 출범한 손길승(孫吉丞)-최태원(崔泰源) 회장의 공동경영체제는 3년여가 지난 현재까지 일단 성공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생소한 눈으로 바라보던 재계의 시각은 경이와 찬탄으로 바뀌고 있다.
▽격변기 성장의 토대〓무엇보다 SK의 투톱 체제는 한국 재벌의 최대 격변기를 오히려 기회로 바꿨다. 내로라하는 대기업이 고비를 넘지 못하고 쓰러졌지만 SK엔 지난 3년여가 오히려 ‘행복한 시절’이었다. 4대 메이저기업에 한참 뒤진 재계 순위 5위의 위상에서 메이저의 중심으로 당당히 편입됐고 고수익 사업구조도 정착됐다.
물론 SK 성공의 배경은 1차적으로 탄탄한 사업기반이 바탕이 됐다. 하지만 후계 과정의 혼란으로 굴지의 그룹들이 나가 떨어지는 와중에 SK는 오히려 도약의 계기로 삼았다는 점에서 ‘투톱 체제 실험’은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SK의 ‘황금률’〓‘최 회장의 몫은 최 회장에게, 손 회장의 몫은 손 회장에게로.’
SK 투톱 경영체제는 이같은 ‘황금률’을 바탕으로 한다. 두 최고경영자는 자기 몫을 적절히 나눠 가지면서 ‘2인 3각’의 양상을 보인다. 같이 전면에 나서면서도 역할을 분담한다.
대체로 손 회장은 대외적 업무, 최 회장은 내치(內治)를 많이 맡는다. 물론 그룹 전체적인 발전 전략을 짜는 것은 공동의 몫이다. 20년간 경영기획실장을 지냈던 손 회장의 치밀한 머리와 최 회장의 투지가 결합한 경영 성적표는 일단 합격점이다.
최 회장에게 손 회장은 ‘파트너’이자 ‘스승’이다. 올해 나이 41세로 아직 젊은 오너인 최 회장은 대외활동은 최대한 자제하면서 손 회장으로부터 경영수업을 받고 있다. 손 회장의 그늘 속으로 스스로 걸어들어가 ‘햇빛’ 속으로 나오기 위한 준비를 착실히 하는 셈이다. 손 회장 역시 ‘최종현의 아들’을 ‘호랑이’로 만들어야 한다는 집념이 강하다.
한편으로 ‘전문경영인 손길승’이라는 간판은 ‘재벌개혁’ 외풍이 거세던 최근 몇 년간 그룹이나 최 회장 모두에게 단단한 방패막이 돼줬다.
물론 최 회장이 일방적으로 받는 입장인 것만은 아니다. 오너의 결단과 추진력이 필요할 땐 최 회장이 그 역할을 떠맡는다.
▽한국적 경영실험〓‘손길승-최태원 체제’의 성공은 이제는 고인이 된 최종현 회장의 막강한 영향과 무관하지 않다.
‘최종현 스쿨’의 수제자인 손 회장은 물론 최종현 회장을 보좌했던 다른 전문경영인들도 여전히 SK에서 예우를 받고 있다. 오너가 절대적 영향력을 휘두르면서 전문경영인이 설 자리가 없었거나 ‘모사(謀士)’ 스타일의 가신형 경영인이 득세하면서 침몰해간 일부 그룹과는 다르다.
그렇다고 ‘신권(臣權)’이 지나치게 센 것도 아니다. 이는 ‘보이지 않는 손’의 힘이 크다. 다름 아닌 생전에 ‘사업 동지’들에게 “아들을 잘 부탁한다”고 했던 고 최종현 회장의 유훈이다. 그룹 내에서 최종현 회장의 유훈은 아직도 헌법의 위력을 가진다.
▽당분간 더 계속될듯〓최 회장의 ‘등극’은 언젠가는 이뤄질 것이다. 이미 몇가지 가시적 움직임도 보인다. ‘최태원 세대’라 할 수 있는 유승렬 최재원 최창원 표문수 등 핵심 인사들이 올해부터 계열사를 장악한 것도 미래를 대비한 포석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현재까지의 성적표와 그룹을 둘러싼 여러 가지 상황을 고려하면 ‘투톱 동거’는 앞으로도 당분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최소한 현정부 임기중에는 최 회장이 전면에 나서지는 않을 것이라는 게 그룹 안팎의 공통된 관측이다.
손 회장은 9월 최종현 회장 3주기에서 “연전에 회장님께 ‘과거와 연계된 구조조정은 끝냈고 이제는 오로지 미래에 대한 대비만 남았습니다’라고 자신있게 고하겠다고 다짐했는데 아직 미진한 점이 남아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SK에서 ‘과거정리’가 아직 남아 있다고 판단할 때까지는 손 회장의 역할도 남아 있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이명재기자>mj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