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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1년 11월 9일 22시 5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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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위간부들 상당수는 개각이 초읽기에 들어가면서 자신의 ‘신상’에도 변화가 올까봐 거의 일손을 놓고 있는 상황입니다.”
경제부처의 한 국장급 간부는 정치권의 혼란이 몰고 온 관료사회의 파장을 이렇게 전하면서 “재·보선 승리로 국회의석 과반수에 육박한 야당의 목소리가 더욱 커진데다 대통령까지 여당 총재직을 내놓음으로써 ‘여, 야’를 구분하기 힘들어져 도대체 어디를 바라보고 일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관료들이 갈피를 잡지 못하면서 정치권의 눈치만 살피고 있다는 것이다.
▽일손 놓은 관료들〓장관의 거취가 불분명한데다 정치권의 협조를 장담할 수 없는 상황에서 아예 일손을 놓는 현상이 생기고 있다. 특히 정치권 장관들이 포진한 부처에서 이런 현상이 두드러진다. 이들 부처는 중립내각을 구성할 경우 장관이 바뀔 가능성이 크므로 내년도 예산관련 업무를 제외하고는 새로운 일을 추진할 엄두를 못내고 있다.
산업자원부의 한 간부는 “최근 몇 년간 6∼7개월마다 장관이 바뀌었는데 또 바뀌는 것이냐”며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고 털어놓았다.
2개월전 민주당 출신 장관이 임명된 해양수산부도 개각 가능성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해양수산부의 한 간부는 “미국 일본 등에서는 장관이 몇 달씩 공석이어도 업무처리에 별 지장이 없는 반면 한국은 업무 대부분이 마비되는 것이 문제”라고 말하기도 했다.
지난달 검찰 개혁안을 발표하고 의욕적으로 추진해온 검찰은 정국이 불투명해지자 법률 제정이나 개정을 전망할 수 없어 무기력한 분위기가 역력하다.
한 검사장은 “여야 합의로 특별검사제 도입이 거의 확실해짐에 따라 검찰이 수사나 제도 개선에 의욕을 보일 수 없으며 지금은 가만히 있는 것이 낫다”고 말했다.
▽정치권 눈치보기 및 줄대기〓재정경제부의 한 과장은 “과거에는 일만 열심히 하면 몇 년 후 어떤 자리에 가 있을지 대략 예측할 수 있었다”면서 “그러나 최근엔 일보다는 ‘정치(인사청탁)’에 더 신경쓰는 사무관이 많고 서기관 부이사관 이사관으로 승진하면서 이런 경향은 더욱 강해진다”고 전했다.
줄대기가 일상화되자 자신의 승진누락을 정치 탓으로 돌리는 관료들도 출현했다. 정부부처의 한 국장은 “원래 고향은 전남인데 서울 소재 고교를 졸업해 김영삼 정권 때 현철씨의 도움을 받았다는 음해로 아직 승진하지 못했다”고 불만을 터뜨리기도 했다.
다른 부처의 간부도 “개각설이 있으면 국장급 이상은 아는 사람을 총동원해 장관후보로 거론되는 인사들에게 줄대기를 한다”고 털어놓았다.
▽심화되는 무기력증〓자신의 일에 소명감을 가지고 소신있게 일하는 관료들을 찾아보기가 점점 힘들어지고 있다. 재경부의 한 서기관은 “과장과 국장이 책임의식과 리더십을 갖고 업무를 추진하지 않고 위의 눈치를 보는 것 같아 안타깝다”며 “공무원이 된 지 15년이 돼가는데 이런 모습을 보면 직업에 회의가 생긴다”고 고민을 토로했다.
그래도 열심히 일하는 관료들은 여야를 싸잡아 비판한다. 경제부처의 한 국장은 “시급한 정책사안이 있어도 여당 의원들이 ‘당(黨) 문제’에만 매달려 ‘나중에 보자’는 식으로 미뤄 정책추진 기능이 마비되고 있다”고 비난했다. 또 다른 간부는 야당이 금융실명법 개정안을 낸 데 대해 “정부는 현행대로 유지한다는 방침에 변화가 없지만 입법권을 가진 국회가 법을 고치면 집행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니냐”고 체념조로 말하기도 했다.
<신연수·홍찬선·이수형기자>hc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