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정부]권력싸움에 국민만 멍든다

  • 입력 2001년 11월 9일 18시 25분


《지금 지구촌은 세계사적인 전환기를 맞고 있다. 국제 정치질서를 뒤바꿀 아프가니스탄 테러전쟁, 21세기 세계 무역질서를 가름할 뉴라운드 협상 등 숨가쁜 상황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온 국력을 합해도 헤쳐 나가기 힘든 메가톤급 사안들이 한꺼번에 벌어지고 있는데 한국정부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여야 모두 나라의 장래보다는 정략적 이해득실에 매몰돼 있지는 않은가. 최근의 ‘힘의 공백’ 상황 때문에 빚어진 정책 표류 사례를 살펴본다.》

▼재경부 “실효없다” 野 설득 곤혹▼

◆법인세율 2%p 인하=재정경제부 세제실은 요즘 초비상에 걸려 있다. 한나라당이 법인세율을 2%포인트 내리겠다고 밝힌 데 이어 자민련도 법인세 인하에 찬성하고 나서 이번 정기국회에서 세율이 내려갈 가능성이 높아졌기 때문.

이에 따라 다음주부터 시작되는 국회 재경위에서 야당 의원들을 설득할 비책을 마련하느라 노심초사하고 있다.

이용섭(李庸燮) 세제실장은 “법인세율을 2%포인트 내릴 경우 건국이래 유지돼 온 조세정책이 크게 흔들릴 것”이라며 “세율은 한번 내리면 그 효과가 수년간 지속되는 만큼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고 밝혔다. 그는 “지방세를 포함한 실효세율도 한국은 30.8%로 대만(25%) 싱가포르(25.5%) 등 일부 도시국가를 제외하고는 미국(40.8%) 일본(36.4%) 중국(33%)보다 낮다”고 설명했다.

한정기(韓廷基) 세제총괄심의관도 “법인세율을 2%포인트 내리면 세금이 2조원 이상 줄어든다”며 “투자 및 경기활성화를 위해서는 세율 인하보다는 임시투자세액공제나 재정지출을 늘리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주장했다.

세율 인하는 이익을 내는 기업에는 도움이 되는 반면 적자기업에는 아무런 혜택이 없다는 것.

한나라당 임태희(任太熙) 의원은 이에 대해 “세율을 낮출 경우 세금이 1조5000억원가량 줄어들겠지만 민간단체에 대한 보조금 등 선심성 예산을 깎고 세출예산 중 70조원가량을 차지하는 인건비 등 경직성 경비를 3%만 절약해도 충분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기업의 부담을 줄여주고 투자를 활성화시켜 침체된 경기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 데다 투자환경을 좋게 해 해외투자를 유치할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홍찬선기자>hcs@donga.com

▼학부모들 “이럴바엔 왜 줄였나”▼

◆교원정년 다시 연장=김대중(金大中) 정부가 교육 개혁의 성과로 꼽고 있는 교원정년 단축도 흔들릴 처지에 놓였다.

한나라당과 자민련은 최근 교원 정년을 현행 62세에서 63세로 1년 연장하려는 내용을 담은 교육공무원법 개정안을 이번 정기국회에서 처리하기로 합의했다.

65세이던 교원 정년은 1999년 1월 당시 공동여당이던 국민회의와 자민련이 관련법을 개정, 62세로 단축했다.

한나라당은 줄곧 ‘교원 정년 65세 환원’을 주장해 왔지만 DJP 공조가 깨진 이후 한나라당이 자민련과의 선택적 공조 차원에서 자민련의 ‘63세 연장안’에 손을 들어준 것.

교원정년 연장에 대해 교사들과 교원단체는 찬성하는 반면 학부모단체는 반대 의사를 밝히는 등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는 극심한 교원 부족사태 해결과 땅에 떨어진 교원의 사기를 진작하기 위해서는 1년이라도 더 늘려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참교육학부모회 윤지희(尹智熙) 회장은 “고령교사의 교육능력 등을 둘러싸고 다시 한번 교원들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고 대규모 명예퇴직으로 실제 교단에 설 수 있는 해당 연령의 교원이 거의 없어 실익이 없다”는 주장이다.

민주당은 교원정년 62세를 고수하고 있다. 정년 단축은 교육계 쇄신 차원에서 한 것이며 정년을 1년 연장해 봤자 효과가 미미하다는 이유에서다. 민주당은 야당이 무리하게 법 개정을 추진하면 대통령에게 거부권 행사를 건의할 방침.

교육부 관계자는 “교원정년 연장은 학부모 반발 등 교육계에 혼란만 초래할 것”이라며 “정년 연장에 반대하는 여론이 거세 야당도 실제로 법 개정을 추진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홍성철기자>sungchul@donga.com

▼복지부 일각 “차라리 野와 협조”▼

◆건강보험 재정 분리=건강보험 재정 통합-분리 논란과 관련해 보건복지부는 혼란에 휩싸여 있다. 건강보험 재정 통합이 내년 1월로 임박한 상황에서 원내 제1당인 한나라당이 재정 분리를 추진하고 있고, 실현 가능성도 높기 때문이다.

우선 한나라당은 7일 건강보험 재정 분리 방침을 당론으로 확정한 데 이어 내주 국회 보건복지위 법안심사소위와 전체회의에서 건강보험법 개정안을 통과시킬 태세다.

심재철(沈在哲) 의원 등은 “현재 자영업자의 소득파악률이 26%에 불과해 직장인과 자영업자에게 단일보험 부과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재정 통합을 강행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주장하고 있다.

반면 민주당은 과거 한나라당이 재정 통합에 찬성해놓고 이제 정부의 의료개혁 실정을 부각시키기 위해 건강보험 재정 문제를 들고 나왔다고 비난하며 개정안에 반대하고 있다. 강현욱(姜賢旭) 정책위의장은 “내년에 재정을 통합한다는 당론에 변함이 없다”고 말했다.

여야의 틈바구니에서 재정 분리시 대책이 전혀 준비되지 않은 보건복지부와 건강보험공단은 매우 곤혹스러운 입장이다. 복지부와 공단 내에서는 최근 두 갈래 기류가 감지되고 있다.

일부 간부들은 “직장-지역의보 통합은 정치권이 결정해서 우리가 따른 사안인데 또 바뀌느냐”며 정치권에 불만을 나타낸다.

반면 “재정 분리의 장점도 많다. 다수당인 한나라당과의 협조가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 이들도 나오고 있다.

한편 보건복지부와 건강보험공단은 엄청나게 불어나는 건강보험 재정적자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순 적자가 올해 적자 예상치(1조1252억원)를 400억원 가까이 넘기고 있지만 담배부담금 문제가 국회에서 해결되지 않아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 것이다.

<문철기자>fullmoon@donga.com

▼학계 “통일문제 정략이용 안돼”▼

◆남북교류협력법 개정=대북정책의 주무부서인 통일부는 자민련과 한나라당이 공동 추진중인 남북교류협력법 및 남북협력기금법 개정 움직임이 가져올 파장 때문에 정치권의 동향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대북지원이라는 ‘당근’으로 북한과의 협상을 이끌어온 대북정책의 근간을 야당이 뿌리째 흔들 것이란 걱정 때문이다.

야당이 추진하는 법 개정 방향의 골격은 대북지원시 국회의 사전동의를 받아야 하고, 정당추천 인사로 남북교류협력위원회를 설치해 남북교류업무를 관장한다는 것. 요는 무분별한 ‘퍼주기식’ 대북정책을 감시하겠다는 의도다.

그러나 통일부 당국자들은 “남북관계가 예측 불가능하다는 특수성을 무시한 법 개정 추진”이라며 “남북교류협력이 전체적으로 얼어붙을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했다.

특히 대북지원이 일반예산으로 편성될 경우 대북협상 수단을 노출시켜 협상력을 약화시킬 수밖에 없다는 것이 정부측 논리다.

예를 들어 대북 비료지원의 수량과 소요 예산을 전년도에 미리 편성할 경우 북한이 편성된 예산을 ‘당연히’ 지원받아야 하는 것으로 받아들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

물론 야권의 논리에도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동안 정부의 대북외교가 북한의 전략에 휘말린 듯한 인상을 준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같은 움직임이 국내정치적 목적에서 출발한 정략적 성격을 갖고 있다는 점도 부인할 수 없는 게 사실.

동용승(董龍昇) 삼성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은 “정치권의 법 개정 움직임이 남북관계의 큰 그림에 입각한 것이 아니라 국내정치의 연장선상에 출발했다는 점에서 충분한 사전논의 및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한편 정부 내에서는 남북교류협력위원들을 정당추천으로 구성하는 데 대해 3권 분립에 위배된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김영식기자>spea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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