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美 전문가 좌담]"윤리 저버리면 시장도 등 돌린다"

  • 입력 2001년 9월 17일 19시 08분


왼쪽부터 문형구, 베렌바임, 손병구.
왼쪽부터 문형구, 베렌바임, 손병구.
《‘글로벌 경제체제에서 윤리경영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 기업윤리(Business Ethics)와 윤리경영이 대기업 최고경영자(CEO)들의 새로운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기업이 시장의 신뢰를 얻어 생존하면서 발전하려면 경영 및 회계의 투명성이 필수적이라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그 대안으로 윤리경영이 주목받고 있는 것. 한국에서도 최근 전국경제인연합회 주도로 대기업 윤리담당 임원들의 모임이 구성되는 등 재계에 ‘윤리경영 바람’이 불고 있다. 하지만 한국의 윤리경영은 미국 등 선진국에 비해 초보상태에 불과한 수준이다. 동아일보 경제부는 △윤리경영의 개념은 무엇인지 △기업들은 왜 윤리경영을 도입해야 하는지 △윤리경영을 활성화하려면 정부와 기업은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지 등을 주제로 한국과 미국의 전문가들이 참여한 특별 좌담을 마련했다.》

▼참석자▼

―손병두(孫炳斗)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사회

―R. 베렌바임

미국 뉴욕대 교수(컨퍼런스보드 기업윤리담당 임원)

―문형구(文炯玖)

고려대 교수(경영학)

▽손병두 부회장〓한국에서는 기업윤리 개념이 최근에야 소개돼 생소하게 느끼는 이도 적지 않습니다. 윤리경영은 무슨 뜻인지부터 설명해주시지요.

▽베렌바임 교수〓윤리경영은 두 가지 측면에서 정의를 내릴 수 있습니다. 우선 소극적으로는 기업이 스스로 윤리강령을 정하고 이를 지키기 위해 애쓰는 ‘자기 규제’의 노력을 뜻합니다. 넓은 의미로는 정보의 비(非)대칭성 등에 따른 시장의 실패를 개선하려는 기업의 노력이 윤리경영의 범주에 들어갑니다. 예컨대 소비자의 정보 부족으로 기업이 부당한 이익을 챙길 경우 윤리적인 회사라면 이를 스스로 시정해야 한다는 얘기지요.

▽문형구 교수〓한국을 비롯한 아시아권에서 윤리경영의 중요성이 부각된 것은 97년말 외환위기를 겪으면서부터입니다. 기존의 아시아적 가치만 고수해서는 경제의 국경이 허물어진 글로벌 경제체제에서 살아남기 힘들다는 자각이 작용한 것이지요. 이제는 기업윤리의 글로벌한 측면을 살리면서도 한국의 문화적 특성을 반영하는, ‘한국형 기업윤리’ 모델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합니다.

▽손병두〓기업들의 경쟁이 치열한 경영환경에서 윤리경영은 현실과 동떨어진, 다소 추상적인 개념으로 비칠 수도 있습니다. CEO 입장에서는 윤리경영을 해서 직접적으로 도움이 돼야 관심을 가질 것입니다. 지금 이 시점에서 윤리경영이 왜 중요하고, 기업들에게는 어떤 이득이 있는지 논의했으면 합니다.

▽문형구〓미국 대기업들이 지난 10년간 사회적으로 공헌한 기여도와 재무적 성취도를 분석해보면 양자간에 상관관계가 매우 높다는 결과가 나옵니다. 일률적으로 단정짓기는 곤란하지만 기업윤리를 잘 지킨 기업일수록 재무 상태가 건전하다는 뜻이지요. 경실련 조사에 따르면 한국에서도 경제정의와 관련해 상을 받은 기업이 같은 업종의 경쟁기업보다 재무측면의 성과가 뛰어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업들이 윤리경영을 망설이는 이유는 즉각적인 인센티브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금융과 세제 분야에서 다양한 인센티브가 법적으로 보장된다면 기업들이 좀더 적극적으로 나설 것입니다.

▽베렌바임〓전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는 기업들은 윤리경영이 대표적인 글로벌 스탠더드라는 점을 인식해야 합니다. 기업윤리를 무시하는 기업은 세계 시장의 소비자나 소비자단체들로부터 외면받을 것입니다. 최근 한국의 대기업들이 자율적으로 윤리강령을 만들고 윤리경영에 나서는 것은 그런 점에서 매우 바람직합니다.

▽손병두〓윤리경영의 필요성에는 모두가 공감하지만 현실적으로 기업 혼자만의 노력으로 이 운동을 확산시키는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정부의 직접적 지원 못지 않게 부패구조를 시정하려는 사회 각계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기업인이 공무원에게 뇌물을 주거나 부패하는 것은 갖가지 명목의 규제로 인해 정부가 버젓이 개별기업 경영에 관여하는 탓이 큽니다. 정부에 밉게 보이면 기업이 불이익을 당한다는 인식이 팽배해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윤리경영을 정착시키려면 규제완화와 행정절차의 간소화를 통해 부패를 유발시키는 구조부터 개선해야 합니다.

▽베렌바임〓동의합니다. 규제가 적을수록 정부의 개입이 줄어들고 뇌물을 주고받을 소지도 사라집니다. 하지만 단순히 규제가 많다고 해서 기업이 파산에까지 이르지는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관련 법을 엄격히 집행해 기업윤리에 대한 경각심을 높이는 일입니다. 일본의 대기업들은 기업상대 소송이 많지 않은 것에 만족한다고 하는데 이는 옳지 않습니다. 비윤리적 행동이 처벌받아야 기업도 각성할 것입니다.

▽문형구〓선진국의 대기업들이 도덕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규제를 어길 경우 기업이 아예문을 닫을 정도로 혹독한 처벌을 받기 때문입니다. 규제 완화를 통해 부패의 소지를 없애는 동시에 가장 기초적인 사항을 위반할 때는 생존이 불가능할 만큼 엄격하게 처벌하는 방식이 병행돼야 합니다. 아울러 인센티브를 줄 경우 윤리경영의 성과를 과학적으로 평가하는 기준을 어떻게 만들 것인지도 기술적으로 검토해야 할 과제입니다.

▽손병두〓전경련 조사결과 500대 기업중 45%가 윤리강령을 만들었고 윤리담당 임원을 선임하는 기업도 늘고 있습니다. 윤리경영을 효율적으로 실천하기 위해 기업들이 어떤 점을 보완해야 하는지 말씀해주시지요.

▽문형구〓일부 임직원들은 윤리강령 자체가 자신들의 행동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악용될지 모른다는 의구심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윤리강령 내용에 대해 구성원들의 합의를 이끌어내는 작업이 이뤄져야 합니다. 윤리담당 임원에게는 실질적인 권한을 부여해 일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줘야 합니다. 또 전경련이 윤리경영을 주도하는 과정에서 대기업 중심으로 치우쳐 중소기업이 소외돼서도 곤란합니다. 산업별, 업종별, 기업규모별 차이를 감안해 모든 기업에 공통되는 윤리기준을 정립해야 합니다.

▽베렌바임〓미국에서도 처음에 윤리강령을 마련했을 때는 ‘이렇게 해야 한다’는 식의 명령조 표현이 많았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종업원들의 의견을 수렴해 자발적인 참여를 유도하는 형태로 바뀌었지요. 며칠전 한국의 대기업 임원을 만났는데 경영 전략을 짤때 국제적인 윤리기준을 고려한다고 하더군요. 한국의 윤리경영 역사가 오래되지 않았지만 출발은 아주 좋다고 생각합니다.

▽손병두〓정부는 기업의 경영 투명성을 확보하기 위해 사외이사제와 대표소송제 등 기업지배구조 개선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정부가 지배구조를 강제하기보다는 기업 자율에 맡기되 경영이 불투명한 기업은 시장에서 응분의 불이익을 주는 방향으로 가야하지 않을까요.

▽베렌바임〓저도 1990년대 중반까지 다양한 이사회 모델을 연구했는데 모범답안은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기업 지배구조는 개별 기업이 처한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밖에 없습니다. 정부가 최소한의 기준은 만들어야 하겠지만 근본적으로는 시장원리에 맡기는게 바람직합니다.

▽문형구〓요즘 젊은이들이 외국계 기업을 선호하는 이유중 하나는 한국 기업은 웬지 음습한 이미지로 비치는 반면 외국 기업은 경영이 투명한 것으로 인식되기 때문입니다. 윤리적인 기업이 유능한 인재 확보에 성공해 경쟁력을 갖는 시대가 됐습니다.

▽손병두〓인류의 보편적인 가치인 윤리가 기업경영에서도 중요한 변수가 되고 있습니다. 윤리경영을 실천하는 기업은 흥하고 그렇지 않은 기업은 도태될 것입니다. 장시간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정리〓박원재기자>parkw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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