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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1년 5월 16일 18시 2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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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일 열린 정재계 간담회를 계기로 최근 정부와 재계는 물론 정치권의 가세로 소모적인 ‘재벌 논쟁’으로까지 이어진 대기업 규제 완화를 둘러싼 논란이 일단 한 고비를 넘길 것으로 보인다.
정부는 재벌개혁의 대원칙을 흐트러뜨리지 않는 범위에서 기업의 투자와 수출을 늘리기 위한 대책 마련에 발빠르게 나섰다. 재계 역시 정부측이 강력히 거부감을 나타내는 출자총액제도 폐지 등의 요구 대신 ‘가능한 선물 보따리’를 얻기에 힘을 쏟았다.
정부와 재계는 양측이 심각한 충돌이나 갈등을 빚는 것처럼 비치는 것이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점을 의식한 듯 부드러운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기업정책을 바라보는 양측의 근본적인 시각차가 여전히 큰 만큼 ‘물밑 갈등’은 여전히 이어질 전망이다. 이런 점을 종합하면 이번 간담회로 정재계간 갈등이 풀렸다기보다는 일단 봉합된 것으로 보는 것이 보다 정확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견해다.
▽투자 및 수출확대 위한 규제 완화에는 공감〓정재계 참석자들은 이날 기업 경쟁력 향상, 구체적으로 투자와 수출을 늘리는 것이 현재 한국경제가 풀어나가야 할 핵심 과제라는 데 인식을 같이 했다. 이를 위해 정부는 전경련 등이 건의한 규제 완화 내용 중 투자와 수출확대에 도움이 되는 내용은 최대한 받아들이겠다는 방침을 재계측에 전달했다.
그동안 재계에 대한 압박을 늦추지 않았던 공정거래위원회가 이날 기자간담회를 자청해 출자총액제한 제도의 예외인정 한도를 확대하겠다는 방침을 내비친 것은 구체적인 후속책으로 풀이된다. 공정위가 검토중인 △구조조정을 위한 출자금액의 예외인정시한 연장 △기존 핵심역량 외에 신규 핵심역량 강화를 위한 투자의 예외 인정 △외국인 투자기업에 대한 예외 인정 요건 완화 등은 재계측이 이번 간담회에서도 건의한 내용이다. 재경부 역시 수도권내 투자에 대한 세금 감면 등 재계측의 투자 및 수출 관련 건의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기 시작해 주목된다. 재계측도 출자총액제한 제도의 폐지가 아니라 ‘예외 확대’에 대해서만 거론하는 등 서로가 한발씩 물러나는 모습도 보였다.

▽근본적인 감정의 골은 쉽게 해소되지 않을 듯〓그러나 겉으로 드러난 이런 성과에도 불구하고 양측이 정말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사이가 됐느냐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각이 더 우세하다.
우선 재계는 정부가 강력히 반대하는 30대 그룹 지정제도나 출자총액제한 제도 폐지와 관련해 처음보다 목소리를 낮췄지만 여전히 이들 제도가 기업경영에 큰 걸림돌이 된다고 보고 있다. 특히 과거와 달리 외국기업들이 국내에 진출해 마음껏 영업활동을 하는 현실에서 30대 그룹 지정 제도는 ‘역차별’이라는 시각이 기업인들 사이에서 팽배하다.
정부측도 재계에 대해 적지 않은 불신감을 갖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특히 현정부 임기말이 가까워 올수록 재계가 정부에 대한 요구사항의 수위를 높이지 않겠느냐는 ‘피해의식’도 어느 정도 갖고 있다.
정부측은 특히 집단소송제 도입 유보나 소액주주 의결권 제한, 출자총액 한도제도 폐지 등에 대해서는 현정부의 ‘재벌개혁정책’의 뿌리를 뒤흔드는 사안이라고 보고 현재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다는 강경 방침을 지키고 있다.
<권순활기자>shkwon@donga.com
▼"생산적 대화 나눴다"…간담회 만족 분위기▼
“무엇인가 결과를 얻어내기 위해 서로가 진지하게 노력한 회의였다. 최근 전경련에서 가진 정재계 간담회 가운데 가장 생산적인 모임이었다.”
손병두(孫炳斗)전경련 부회장은 정재계 간담회를 마친 뒤 꽤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한 참석자의 이 같은 발언을 소개했다.
정부와 재계는 이미 언론을 통해 ‘대리전’을 치렀고 야당이 이 부분을 정치쟁점화한 탓인지 이날 회의는 양측 모두 서로의 입장을 존중하려는 태도가 뚜렷했다.
진념(陳稔) 경제부총리와 장재식(張在植) 산업자원부장관은 간담회를 시작하면서 “기업인이야말로 애국자”라며 기업을 추켜세운 뒤 “정부는 기업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 돕겠다”고 말했다.
이어 비공개로 진행된 30대 그룹 구조조정본부장의 발언시간에서 처음에는 발언자가 없어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그러나 손부회장이 발언자를 지명하며 대화를 유도하자 차츰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지명자들은 정부규제로 인해 자신의 회사가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 사례를 들어가며 구체적으로 말했다. 간담회가 예상시간(2시간)보다 40분 늦게 끝난 것도 참석한 구조본부장 대부분이 발언을 할 정도로 대화가 활발했기 때문.
A그룹의 본부장은 “주력회사의 외국인 지분이 50%에 육박했는데 계열금융회사가 가진 주식은 의결권을 인정해주지 않아 경영권 방어가 어려운 측면이 있다”며 “계열금융사가 가진 주식도 의결권을 인정해달라”고 말했다. B그룹 본부장은 “정부가 과거의 부실을 해결하는데 집착하고 있다”며 “5년, 10년 뒤 기업이 무엇으로 경쟁을 할 것인지 정부에서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구조본부장의 발언을 듣던 진부총리는 “기업들이 외환위기 이후 투명성, 수익성, 건전성을 높이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했는데 아직도 외국에서는 이를 제대로 평가해주지 않고 있다”며 “정부와 기업에서 이런 부분을 적극적으로 알릴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날 회의에 참석한 한 재계인사는 “김대중 정부의 개혁드라이브에 밀려 함부로 말도 꺼내지 못했던 재계가 경제침체와 정부가 총체적으로 수세에 처한 틈을 타 모처럼 기지개를 폈다”며 “정부도 유연한 자세를 보여 재계도 상당히 만족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병기기자>ey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