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重민영화]두산 '제2도약' 날개 달았다

  • 입력 2000년 12월 12일 18시 4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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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재에서 중간재로, 다시 자본재로.’

OB맥주로 상징되는 두산그룹의 이미지 변신이 눈부실 정도로 빠르다. 104년의 기업역사가 말해주듯 보수적인 이미지를 가진 두산이 95년 그룹구조조정에 착수한 이후 날렵한 행보를 계속하고 있다. 특히 두산의 이번 한중 인수는 5년간의 뼈를 깎는 구조조정을 통해 체력을 보강한 뒤 다시 확장경영에 나섰다는 점에서 재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두산은 재계 순위 12위(자산순위)로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기업이다. 1896년 서울 동대문에서 포목상을 운영하던 박승직씨에 의해 ‘박승직 상점’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한 이 회사는 1946년 창업주의 장남 박두병씨에 의해 두산이라는 회사명으로 새출발했다. 두산은 6·25전쟁이 한창이던 52년 OB맥주를 설립하고 무역업을 시작함으로써 현대적인 기업의 기틀을 마련했다. 이어 60년대부터두산건설, 두산음료, 두산기계, 두산전자 등을 차례로 설립해 사세를 확장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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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산에 ‘위기’가 찾아온 것은 95년. 당시 창립 100주년을 눈앞에 둔 두산 경영진은 다른 그룹들보다 더욱 심한 자금난에 빠졌다. 서둘러 구조조정에 나서 29개 계열사가 23개로 축소됐다. 전국 곳곳에 있는 부동산과 3M, 코닥, 네슬레 등 ‘알짜 사업’ 부문들을 과감히 팔았다. 음료사업의 대명사격이던 코카콜라도 미국측에 넘겼다.

당시 재계는 “미래를 포기한 두산”이라며 동정론까지 폈다. 그러나 두산의 진가는 97년 외환위기 직후 입증됐다. 일찍 구조조정을 시작한 덕분에 제값을 받고 계열사를 정리할 수 있었고 자금난도 겪지 않았다.

두산은 또 제2차 구조조정작업에 착수, 23개 계열사를 ㈜두산, 두산건설, 두산포장, 오리콤 등 주력 4개사로 통합했다. 특히 기업의 현금흐름 개선을 위해 OB맥주의 지분 50%를 벨기에의 인터브루사에, 양주사업부문 전체를 캐나다의 씨그램사에 각각 매각했다. 사실상 소비재 부문을 거의 포기하고 중간재 제조회사로 변신한 것.

이처럼 일련의 구조조정작업 결과 두산은 작년말 현재 자산 7조6449억원(자본금 7881억원, 부채 4조6896억원)에 매출액 3조6532억원(당기순익 5908억원)의 우량기업으로 탈바꿈했다.

재계는 소비자에게 직접 술, 필름, 분유를 팔던 소비재기업에서 자본재기업으로 변신하고 재도약의 기틀을 마련한 두산이 어떻게 변화해나갈지 관심있게 지켜보고 있다.

<이병기기자>eye@donga.com

▼두산 박용만사장 "수익성 위주로 韓重 개편"

“창업 104년 만에 드디어 제2의 도약기를 마련하게 됐습니다.”

12일 산업은행 본점에서 열린 한국중공업 공개입찰에서 새 주인이 된 두산의 박용만(朴容晩·사진)사장 겸 전략기획본부장은 “소비재와 산업재를 양대 축으로 하는 초우량기업군으로 성장할 것”이라며 자신감을 표시했다.

박사장은 “95년부터 시작된 대대적인 구조조정작업을 통해 튼튼한 재무구조를 갖춘 데다 정부의 민영화방침이 맞아떨어졌다”면서 “일련의 구조조정과 사업매각을 통해 인수에 필요한 자금을 이미 확보해 놓고 있다”고 밝혔다.그는 “두산의 기존 경영방식을 한중 경영에 접목시킬 경우 경영시스템을 효율적으로 개선할 수 있을 것”이라며 한중 경영에 자신감을 보였다. 두산의 지난해 영업이익률은 11.5%로 재계 2위. 박사장은 “한중을 수익성 있는 사업구조로 개편하기 위해 국내 발전사업에 비중을 두는 한편 담수설비 확대 등 사업영역을 적극 넓히겠다”고 말했다.

<이종재기자>jjlee@donga.com

▼韓重 미래는▼

두산이 한국중공업의 새 주인으로 확정됨에 따라 한중은 20여년 간 입었던 ‘공기업 옷’을 벗게 됐다.

두산은 15일 정부와 정식 계약을 맺은 뒤 주식대금을 모두 내야 한중의 경영권을 갖게 된다. 주금 납부는 우선 200억원을 계약금으로 내고 45일 이내에 잔금을 한꺼번에 내거나 내년 3월까지 3회에 걸쳐 나눠 내야 한다. 두산은 분할납부를 선택할 것이 확실시돼 내년 3월20일경에야 한중의 경영권을 확보한다. 두산은 “경영권을 확보한 뒤 전문 경영인을 영입, 그룹의 경영간섭을 배제하고 이사회중심으로 운영하는 등 선진화된 기업지배구조를 갖출 계획”이라고 밝혔다.

한중의 두산측 주주인 ㈜두산의 경우 자동차용 로봇과 CNC선반(컴퓨터수치 제어공작기계) 등 공작기계분야와 정밀화학 석유화학 및 원자력 플랜트사업분야를 갖고 있다. 두산건설은 경기 이천시에 열병합발전소를 운영하고 있다. 결국 두산은 ㈜두산 및 두산건설과 한국중공업의 사업이 겹치는 부분을 조정하면서 사업구조와 더불어 인력구조조정을 강도 높게 추진할 것으로 예상된다. 두산 측은 “한중을 인수하면 2년 이내 이익률을 5% 이상으로 올릴 수 있으며 원칙적으로 종업원은 그대로 고용승계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한중은 9년 연속 흑자를 기록하고 있지만 이익률은 IMF 외환위기 이전에는 5%대, IMF 이후에는 1%대에 머물고 있다.

증권가에서는 한중이 민영화되면 경영투명성과 효율성을 높일 수 있어 기업가치와 주가가 올라갈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또 현재 추진중인 미국의 GE 등 해외선진업체와의 제휴가 성공적으로 이뤄지면 이 회사의 기술력 역시 크게 높아질 것으로 기대된다.두산이 운영하는 한중의 미래가 밝은 것만은 아니다.우선 한중의 발전설비를 납품 받는 한국전력이 민영화돼 발전설비를 국제입찰로 발주하면 국내발전설비 독점공급체제가 깨지게 된다. 또한업종 자체가 경기에 민감해서 앞으로 경기가 둔화될 경우 영업에 어려움을 겪을 것으로 보인다. 결국

두산이 한중을 잘 골랐는지의 여부는 공기업체제에 익숙해진 한중을 얼마나 새롭게 탈바꿈시키느냐에 달려있다.

<이병기기자>eye@donga.com

▼파란만장한 韓重 약사▼

한국중공업의 사사(社史)를 읽다 보면 한국의 중화학공업 정책사를 읽는 것처럼 상처로 얼룩져있다. 1차 중화학투자조정 업체(79년), 2차 중화학투자조정조치 및 공기업변신(80년), 민영화 무산(88년), 산업합리화조치(90년), 빅딜(2000년) 등 62년 설립 이후 한중은 28년 간 정부의 산업정책에 단골손님으로 지정됐다.

한중의 전신은 62년 정주영(鄭周永)회장의 첫째동생인 정인영(鄭仁永)한라 명예회장이 설립한 현대양행. 군에 양식기를 납품하는 업체로 출발, 76년부터 창원에 종합기계공장을 착공하면서 기계 및 발전설비 업체로 변신했다.

그러나 발전설비업체가 4개로 난립하면서 영업이 어려워져 79년 현대양행은 현대그룹으로 넘어가게 된다. 그러나 잇단 중화학투자조정 조치에도 불구하고 회사는 어려워져 산업은행 한국전력공사 외환은행 등이 지분을 인수, 공기업으로 변신한다.

88년 경영이 악화되면서 노태우(盧泰愚)정부시절 한중은 두 번이나 민영화가 추진되지만 응찰에 나섰던 현대와 삼성측이 변죽만 울리고 인수에는 나서지 않아 민영화에 실패한다. 당시 외형경쟁에 치중했던 현대 삼성이 상대편이 한중을 인수하는 것을 두려워하면서도 회사실적이 좋지 않은 한중 인수에는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던 것.

90년 정부는 산업합리화조치로 발전설비를 한중으로 몰아주면서 한중은 영업실적이 좋아지면서 흑자를 기록했다. 91년에는 경영정상화에 성공, 94년에는 누적적자를 완전 해소했다. 독점의 혜택을 톡톡히 누린 셈.

김영삼(金泳三)정부시절인 93년 말 다시 민영화가 추진됐지만 영동사옥을 둘러싼 현대산업개발과의 소송 등 복잡한 일이 겹치면서 끝내 성사되지 못했다. 결국 3차례의 민영화시도 끝에 한중은 민간기업의 품으로 돌아가게 됐다.

<이병기기자>ey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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