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白旗배경]명분도 잃고 실리도 잃었다

  • 입력 2000년 5월 4일 19시 06분


코멘트
경영진 갈등 이후 계속된 비판적 여론 속에서 현대는 줄곧 수세에 몰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10일 만에 정부를 ‘만족시킬 만한 대책’을 내놓는 것으로 이번 사태는 막을 내렸다.

지난달 24일 참여연대의 현대투신 바이코리아펀드의 부당 편출입 폭로가 나왔을 때만 해도 금융당국은 시장을 고려해 현대를 감싸는 모습이었다.

현대주가가 계속 바닥권을 맴돌자 현대는 급기야 4월28일 외자유치 지분매각 등을 골자로 한 1차 경영정상화 계획을 발표했으나 신선한 내용이 없었던 탓에 시장반응은 차가웠다. 현대에 실망한 정부는 ‘유동성지원조차 재검토하겠다’는 입장으로 돌아섰다.

그러나 현대는 “정부가 경영권 박탈을 의도하는 것 아닌가”라며 강력히 반발했다. 제스처에 불과했는지는 모르지만 3일 오전엔 결코 사재 출자를 할 수 없다며 정부에 정면으로 맞서는 듯한 모습까지 보였다.

그러나 3일 낮 이기호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이 ‘자본 잠식분 1조2000억원을 메우라’는 구체적 주문으로 압박을 가하면서 현대가 밀리는 상황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청와대의 의지가 분명히 드러나면서 정부 관계자들과 현대 모두 퇴로가 차단된 모습이었다.

정부측의 마지노선이 공개되자 현대투신 이창식사장은 이날 오후 9시경 ‘정몽헌회장 보유 현대택배 주식 1000억원어치(현대 추정)를 출자한다’는 후퇴안을 내놓으면서 여론을 떠보았다.

그러나 금감위측이 사재 출자와 병행해 ‘담보 제시’안을 꺼내면서 현대는 더욱 수세에 몰렸다. 이사장은 “사재 1000억원과 연내 외자유치 2000억원이 가능한 만큼 나머지 9000억원에 해당하는 담보를 내놓겠다”는 수정안을 내놓았지만 금감위의 반응은 ‘주식가치를 믿을 수 없으니 담보는 1조7000억원어치가 적당하다’는 것. 금감위는 한술 더 떠 담보효력을 확실히 하기 위해 처분위임장까지 작성하라고 요구했다.

최후통첩을 받은 현대 구조조정본부가 갑자기 분주해졌다. 심야회의에서 격론이 오간 후 김재수 구조조정본부장은 ‘4일 발표’를 준비토록 지시했다. 정주영 정몽구 정몽헌 3부자 가운데 왜 몽헌회장만 몽땅 뒤집어써야 하느냐는 반발은 이 때쯤 잠잠해졌다.

현대측 최후 답변이 온 것은 4일 새벽 명예회장의 재가가 이뤄진 뒤인 오전 9시경. 1시간 뒤 현대측 ‘항복문서(정상화방안 발표문안)’가 금감위에 팩스로 전달되면서 금융시장 안정을 볼모로 했던 위험한 힘 겨루기는 정부의 의도대로 끝을 냈다.

<박래정·이병기기자>ecopark@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