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류하는 경제개혁]『고용조정』강조하며 한쪽선 인턴채용

  • 입력 1998년 4월 18일 20시 1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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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金大中)대통령과 재벌총수들이 재벌개혁의 대원칙에 합의한 지 3개월이 지났다. 그동안 상호지급보증 해소, 기조실 폐지 등 급박하게 돌아갔던 대기업들의 구조조정 작업이 최근 지지부진해졌다.

고용조정이나 재무구조개선 계획 등 정교한 가이드라인이 필요한 사안을 놓고 정부 부처마다 상충되는 ‘신호’를 보내는 바람에 기업이 우왕좌왕하고 정부의 주요 경제정책이 표류하는 결과가 초래되고 있다. 개혁의 ‘총대’를 멘 금융권도 흔들리기는 마찬가지다.

▼앞뒤 안맞는 정부의 고용정책〓정부는 2월 사실상의 대규모 정리해고를 허용하는 노사정 합의를 이끌어냈다. 그러나 지난달 말 진념(陳稔)기획예산위원장은 재계에 27만명에 달하는 대졸 실업자들을 인턴사원으로 채용해줄 것을 공식 요청, 대기업들을 어리둥절하게 했다.

인턴사원 채용요청은 물론 상반기 기업공채가 사라져 대졸 실직자 문제가 사회적 이슈가 될 것을 우려한 것. 그러나 30대 그룹내 80%에 가까운 대기업들이 인력줄이기와 월급깎기에 나선 상황에서 인턴사원 채용요청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고 신정부의 시장주의 원칙이 의심스럽다’는 반발만 샀다.

30대 그룹 인사담당 임원들은 “인턴사원 채용은 신규사원 채용의 전단계로 봐야 하며 이는 정리해고 요건인 ‘해고회피’노력에 어긋난다”는 입장. D그룹 인사담당 임원은 “고금리에 매출이 급격히 줄고 가동률이 절반 이하로 곤두박질치고 있어 당장 사람을 줄여야 하는 급박한 상황”이라며 “정부의 ‘현실인식’에 실망했다”고 말했다.

대기업에 인턴사원 채용을 요청한 기획예산위는 그러나 과학기술부의 인턴연구원 채용방침엔 제동을 걸었다. ‘출연연구기관 조직 및 인원축소방침에 어긋난다’는 것.

외국자본들은 특히 대기업의 ‘고용조정’에 신경을 곤두세운다. 전경련 관계자는 “외국기업들은 정부가 기업인사에 감놔라 대추놔라 하는 것을 강성노조가 외자유치를 막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게 본다”고 우려한다.

▼구체적인 가이드라인 제시에 인색한 정부〓H은행 등 시중은행들은 지난달 31일 기업에 공문을 보내 ‘이달 10일까지 재무구조 개선변경안을 내고 15일쯤 약정을 다시 맺자’고 주요 그룹에 통보했다. 지난 달 24일 이헌재(李憲宰)금감위원장이 은행임원들에게 “2002년까지 부채비율을 200%로 낮추기로 약정했던 것을 3년 앞당기라”고 촉구한 데 따른 것.

그러나 이위원장이 지난 1일 기자회견에서 스스로 “구체적으로 200%를 언급한 적이 없다”고 말을 뒤집었다. 더욱이 이규성(李揆成)재정경제부장관이 전경련 회장단에게 “일률적으로 200%를 적용하는 것은 문제”라고 언급하면서 금융권까지 혼란에 빠졌다. 김태동(金泰東)청와대경제수석이 뒤늦게 ‘업종별로 부채비율에 차등을 둬야 한다’고 교통정리에 나섰지만 대기업 및 금융기관들은 업종이 다른 계열사들의 부채비율을 어떻게 산정해야 할지 고민중이다.

현재 은행들은 일단 약정 재체결을 강행하는 모습이라도 보인다는 방침. 기업 구조개혁에 앞장서지 않으면 정부가 어떤 불이익을 줄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여당 등이 기업 도산을 막는다며 ‘20조원의 기업대출금을 은행출자로 전환하겠다’고 발표해 금감위와 금융권의 구조개혁 노력에 찬물을 끼얹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시간을 달라’며 개혁을 비켜가려는 재계〓정부가 정책혼선을 빚는 가운데 재계는 정부의 무리수를 지적하는 자료를 잇달아 쏟아내며 ‘현실 적합성’을 집중 부각시키고 있다.

전경련은 최근 “주요 그룹들이 은행 종금사 등의 차입금을 다 갚아도 부채비율은 310%에 달한다”는 자료를 냈다. 회사채 외상매입금 등 직접금융으로 조달한 빚이 많아 정부가 ‘헛다리를 짚고 있다’는 것.

전경련은 또 구조조정에 미온적이라는 청와대의 지적에 “구조조정을 재촉하는 바람에 외국기업들이 매물가격이 떨어지길 기다리며 협상을 질질 끈다”고 우회적으로 불만을 표시했다.

일부 대기업들은 최근 “자산재평가와 전환사채 등 실제 돈이 들어오지 않고도 부채비율을 낮출 수 있는 방안을 정부가 인정해달라”고 요청했다. 2월 ‘일주일만에 써낸’ 재무구조개선계획에 스스로 무게를 두지 않는 그룹들이 대부분이다.

▼‘욕먹기’를 각오한 정책 당국이 없다〓경제정책 혼선은 비슷한 기능이 여러 군데로 분산되고 과거 경제정책을 조율했던 경제부총리제가 폐지되면서 예상됐던 일. 김원길(金元吉)국민회의 정책위의장은 최근 “정부 부처마다 입장이 달라 정책에 혼선이 빚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며 “개혁의 대원칙을 인정하고 유연하게 대응해야 하는 것이 기업의 숙명”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정책혼선이 개혁의 정당성을 약화시켜 정책효과를 반감할 것은 뻔한 일. L그룹 재무팀 관계자는 “부처간에도 손발이 맞지 않는 정책을 어떻게 기업이 따르겠느냐”며 “지방자치 선거를 의식, 정부가 인기영합적으로 지나치게 서두르는 느낌이 있다”고 지적했다.

정운찬(鄭雲燦)서울대교수는 “개혁 초기엔 부작용이 나타나게 마련”이라며 “당장엔 욕을 먹더라도 정책 우선순위에 충실하고 나중에 제대로 평가받겠다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박래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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