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이란의 전쟁으로 호르무즈 해협이 봉쇄됐다. 이 좁은 바닷길로 세계 원유 해상 수송량의 20∼30%가 오간다. 이 길이 막히자 유가가 폭등했을 뿐만 아니라 석유화학 제품의 생산에도 큰 차질이 생겼다. 앞서 2022년에도 러시아가 ‘유럽의 곡창지대’인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며 천연가스 수출을 통제하자 식량과 에너지 위기가 찾아왔다.
세계화로 촘촘히 연결된 국제 경제에서 이런 위기가 현실화될 때마다 떠오르는 주장이 있다. 국가안보와 주권,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대외 의존을 줄이고 핵심 산업을 자급자족할 수 있어야 한다고 얘기한다. 그러기 위해 막대한 보조금과 관세를 수단으로 동원하자고 주장한다.
영국 경제 저널리스트인 저자는 이런 주장을 ‘고립 경제학(Exile Economics)’이라고 명명했다. 자급자족에 대한 이런 환상은 그 기원을 고대 그리스에서 발견할 수 있을 정도로 오래됐다. 정치적 좌우를 가리지도 않는다. 관세 폭탄으로 미국의 산업과 노동자를 지키겠다고 천명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대표적인 고립 경제학의 신봉자로 공화당원이다. 그러나 중국의 전기차·반도체 굴기를 안보 위기로 규정한 건 민주당 조 바이든 전 대통령이었다. 국내 산업계의 로비와 노동자의 분노에 직면한 정치인이라면 고립 경제학의 유혹에 노출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저자는 식량과 에너지, 실리콘(반도체), 철강, 사람(인적 자원), 의약품 등 여러 분야를 사례로 들며 자급자족론은 현실적이지 않다고 강조한다. 세계화가 얼마나 많은 수혜를 가져다주었는지도 상기시킨다. 탈세계화는 식량 안정성 확보와 친환경 기술 발전에 역행하고, 철강의 과잉 생산 문제를 심화할 뿐이라는 지적이다.
물론 세계화는 분야별로 승자와 패자를 낳기도 했다. 하지만 전체적인 풍요와 기술 발전을 가져왔음을 잊어선 안 된다고 책은 강조한다. 공급망의 구멍이 뚫렸을 때를 대비해야 하지만 허황된 자급자족 대신 공급망을 정밀하게 파악하고, 핵심 물자를 비축하고, 무역을 다변화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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