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에게 뜨거운 사랑을 받는 베스트셀러. 창작자들은 자신이 만든 콘텐츠가 베스트셀러가 되길 꿈꾸지만, 실제로 실현될 가능성은 극히 낮다. 이 희귀한 확률을 뚫고 베스트셀러가 된 콘텐츠가 탄생한 과정을 들여다본다. 창작자의 노하우를 비롯해 이 시대 사람들의 욕망, 사회 트렌드 등을 확인할 수 있다.
10년 넘는 혹독한 수련 기간이 지나 신경외과 레지던트 생활은 이제 15개월 남았다. 여러 명문대에서 교수 자리를 제안했다. 내과 의사인 아내, 앞으로 태어날 아이들과 보트를 타고 휴가를 보낼 꿈에 부풀었다. ‘약속의 땅’이 눈앞에 보였지만 닿을 순 없었다. 폐암 말기 진단을 받은 것. 그의 나이 서른 여섯이었다.
성공의 정점을 향해 가다 폐암 진단을 받고 2년 후 눈을 감을 때까지 쓴 에세이 ‘숨결이 바람 될 때’(흐름출판)의 저자 폴 칼라니티(1977~2015)의 이야기다. 작가를 꿈꾸며 스탠퍼드대에서 영문학, 생물학을 전공하고 영문학 석사 학위를 받은 그는 인간을 영적·생리적 측면에서 이해하기 위해 의사가 되기로 마음먹는다. 예일대 의과대학원을 마친 후 스탠퍼드대병원에서 레지던트로 근무한다.
‘숨결이 바람 될 때’의 저자 폴 칼라니티(왼쪽)과 아내 루시. ⓒStella Blackmon
암 진단을 받은 그는 삶이 석 달 남았다면 가족과 함께 지내고 1년이 남았다면 책을 쓰고 10년이 남았다면 사람들을 치료하는 생활로 복귀하고 싶다고 말한다. 하지만 남은 시간이 얼마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 그는 죽음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일상을 이어간다. 아내와 상의해 아이를 갖고, 암 치료를 받으며 통증이 줄어들자 다시 환자를 돌본다. “내가 죽어가고 있더라도 실제로 죽기 전까지는 나는 여전히 살아 있다”며.
매일 14시간 환자를 돌보고 36시간 동안 이어지는 수술을 하면서 저자는 단순히 사람을 살리느냐 여부를 넘어 환자에게 살 만한 가치가 있는 삶을 고민했다. 몇 달 더 살 수 있지만 말을 못하게 된다면, 치명적인 뇌출혈 가능성을 낮추기 위해 시력 손상을 감수해야 한다면, 발작을 멈추게 하려다 오른손을 못 쓰게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환자가 된 후 그는 “의사의 의무는 죽음을 늦추거나 환자에게 예전의 삶을 돌려주는 것이 아니라, 삶이 무너져버린 환자와 그 가족을 가슴에 품고 그들이 다시 일어나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돕는 것임을 깨달았다”고 고백한다.
병원에서 근무하는 폴 칼라니티. ⓒNorbert von der Groben , Stanford Healthcare
2016년 국내 출간된 이 책은 삶에 대한 묵직하고 섬세한 성찰이 빚어낸 울림으로 독자들을 사로잡았다. 책은 100쇄를 찍으며 판매량 30만 권을 돌파했다.(국내 출판계의 베스트셀러 기준은 책 판매량 1만 권이다.) 지난해 11월 100쇄 기념판이 출간됐다. 기념판 5000권은 대부분 판매된 상태다.
‘숨결이 바람 될 때’ 100쇄 기념판 표지. 흐름출판 제공 ‘숨결이 바람 될 때’를 낸 흐름출판의 유정연 대표와 조현주 부장을 6일 서울 마포구 흐름출판에서 만났다. 유 대표가 출간을 검토한 건 미국에서 2016년 책이 나오기 전이었다.
“에이전시에서 보낸 샘플 원고를 보니 글이 정말 좋았어요. 저자가 암 진단을 받고 뉴욕타임스(NYT)에 기고한 글 ‘시간은 얼마나 남았는가(How Long Have I Got Left?)’가 당시 미국에서 화제가 됐죠. 유명인도 아닌데다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책이지만 글이 워낙 뛰어나서 출간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유 대표)
국내 몇몇 출판사들도 관심을 보였지만 경쟁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고 한다. 그래서 높지 않은 가격에 판권을 구입할 수 있었다. 이종인 번역가는 원제 ‘When Breath Becomes Air’의 우리말 제목으로 ‘숨결이 바람 될 때’를 제안했다. 유 대표는 “글의 결에 꼭 맞는 표현이었다”고 했다. 관건은 부제였다. 큰 제목만으로는 내용을 알리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젊은 의사가 죽음을 앞두고 쓴 글이라는 걸 압축해서 부제에 담아야 했습니다. 편집자, 마케터 등과 함께 여러 단어들을 풀어놓은 채 머리를 싸맸습니다. 고민을 거듭하다 핵심 단어를 추려 ‘서른여섯 젊은 의사의 마지막 순간’이라는 부제를 뽑았죠.”(유 대표)
딸 케이디를 안고 웃는 폴 칼라니티. ⓒMark Hanlon and Stanford University School of Medicine
딸 케이디와 함께 한 폴 칼라니티(왼쪽)와 아내 루시. ⓒGale Gettinger
책 표지는 원서와 동일하게 만들었다. 책은 출간되자마자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독자들은 ‘죽음을 대면하는 상황에서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강인한 정신력에 울컥했다’, ‘삶을 되돌아보게 됐다’, ‘마음 속 깊이 여운이 남는다’는 리뷰를 올렸다. 도서관에서 대여해 읽다 소장하고 싶어 구입했다는 이들도 많다. ‘의대생이 꼭 읽어야 하는 책’이라는 말도 나왔다. 2016년부터 현재까지, 다양한 나이의 남녀로 독자층이 확대되고 있다. 옥택연 손태영 최은경 김지수 전노민 등 책을 좋아하는 연예인들도 추천을 이어갔다. 유 대표는 “연예인을 대상으로 마케팅하진 않았다. (저자의) 글이 모든 걸 해냈다”고 말했다.
100쇄 기념판 표지는 무광택의 새하얀 바탕에 쨍한 파란색으로 새가 날아가는 형상을 넣었다. 새를 표현한 앙리 마티스의 작품에서 영감을 얻어 디자인한 것. 영어 원제와 한글 제목 모두 같은 색으로 처리해 청명한 느낌을 준다. 제목 중 ‘바람’은 글씨가 점점이 흩어지게 해 바람에 날리는 느낌을 살렸다.
조 부장은 “지난해 초부터 100쇄 기념판 디자인을 고민했다”고 말했다.
“삶의 비극을 대하는 저자의 단단하고 아름다운 태도를 표현하고 싶었어요. 표지는 동판을 만들어 판화처럼 찍어냈는데요, 종이별로 색깔이 다르게 나와 100개 종류의 종이에 하나하나 찍어서 비교했어요. 계속 살피다 보니 나중에는 다들 비슷하게 보일 지경이었죠.(웃음) 찍어내는 작업은 시간이 많이 걸리고 실패율도 높아 비용이 많이 들지만 공들여 만들고 싶었습니다.”(조 부장)
띠지 없이 책은 투명한 비닐로 포장했다. 띠지 두르기와 마찬가지로 비닐 포장 역시 기계로 할 수 없어 사람이 일일이 손으로 작업했다.
“홍보 문구를 넣는 띠지는 강력한 마케팅 수단이에요. 하지만 기념판은 홍보 문구를 더하지 않아도 사랑받을 거라 확신했습니다. 비닐 포장은 책을 보호하고 돋보이게 하는 동시에 정성스러운 느낌을 전할 수 있고요.”(조 부장)
조 부장은 소설가인 대학 은사로부터 “‘숨결이 바람 될 때’를 스무 권 사서 지인들에게 선물했다”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조 부장은 “독자들이 선물용으로 책을 구입했다는 얘기를 많이 듣긴 했는데, 은사님 말씀을 들으며 피부로 실감했다”고 말했다.
‘숨결이 바람될 때’ 책표지. 흐름출판 제공 기념판이 완전히 소진되면 원래 표지의 책을 판매할 예정이다. 조 부장은 “6월에 열리는 서울국제도서전에 참석하는 독자들을 위해 기념판은 200권만 따로 남겨뒀다”고 했다.
저자가 원고를 완성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후 이를 마무리한 아내 루시는 출간 전 두려웠다고 밝힌 바 있다. 저작권 대리인에게 책에 대한 반응이 좋을지 묻자 “글쎄요. 독자들이 최근에 죽은 남자의 회고록을 읽고 싶어 하는지에 달렸겠죠”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지금까지도 한국은 물론 미국 등 세계 곳곳에서 독자들과 만나고 있다.
“저자는 가장 빛나는 순간 맨 밑바닥으로 떨어졌지만 눈부시게 살아갔습니다. 넘어졌을지언정 주저앉지 않고 계속 나아갔죠. 상처 입거나 좌절의 순간에 있는 분들이 꼭 읽었으면 좋겠습니다.”(조 부장)
■‘숨결이 바람 될 때: 서른여섯 젊은 의사의 마지막 순간’(2016년·흐름출판)은….
미국 스탠퍼드대병원 신경외과 레지던트 폴 칼라니티(1977~2015)가 폐암 진단을 받고 2년 뒤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쓴 에세이다. 그는 죽음을 직시하며 일상을 뚜벅뚜벅 걸어 나갔다. 부모님이 인도 출신으로, 아버지가 의사였던 저자는 자신이 의사가 되리라곤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작가가 되길 희망하며 스탠퍼드대에서 영문학, 생물학을 전공하고 영문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인간에 대해 탐구하던 그는 의사가 되기로 결심한다. 육체적 쇠락과 죽음 앞에서도 삶을 의미 있게 만들어주는 것은 무엇인지 고민하다 의학에서 길을 찾은 것. 예일대 의과대학원을 마친 후 스탠퍼드대병원에서 레지던트로 근무한다.
10년이 넘는 수련 기간을 마치고 레지던트 생활이 15개월 남았을 때 그는 마침내 꿈꾸던 삶이 다가왔다고 여겼다. 여러 명문대에서 교수 자리를 제안 받았고 내과 의사인 아내 루시, 앞으로 태어날 아이들과 주말을 보낼 수 있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극심한 요통에 시달리던 그는 폐암 진단을 받았다. 얼마나 살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그는 암 치료를 받으며 통증이 줄어들자 환자를 돌보고 수술하며 일상을 이어간다. 그는 말한다. “난 그렇게 할 수 있으니까. 그게 바로 나니까.”
아내와 상의해 아이도 갖기로 한다. “아기와 헤어져야 한다면 죽음이 더 고통스럽지 않을까?”라는 아내의 우려에 그는 답한다. “그렇다 해도 아기는 멋진 선물 아니겠어?” 이에 암 치료를 받기 전 정자은행에 정자를 보관하고, 딸 케이디를 얻는다.
저자는 환자를 처리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각각의 역사를 가진 한 명의 ‘인간’으로 바라보려 애썼다. 해부용 시신의 위에 남아 있는 모르핀 두 알을 보며 고통 속에 약병을 더듬었을 고인의 생전 모습을 떠올린다. 뇌출혈, 발작 등 심각한 병을 고치기 위해 한 뇌수술로 시력을 잃거나 한쪽 손을 못 쓰게 될 경우 환자가 겪어야 하는 삶에 대해 고민한다. 그럼에도 자신이 환자가 된 후에는 그 동안 의사로서 오만했다고 고백한다.
너무나 일찍 다가온 죽음 앞에서 그를 버티게 해 준 건 문학이었다. 아침에 눈을 떠 통증에 시달리던 그는 불현듯 떠오른 문장을 반복해 읊조리며 힘겹게 침대 밖으로 나간다. “나는 계속 나아갈 수 없어. 그래도 계속 나아갈거야.(I can‘t go on. I’ll go on.)“ 사뮈엘 베케트의 소설 ‘이름 붙일 수 없는 자’에 나오는 대목이다. 솔제니친의 ‘암 병동’,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비롯해 카프카, 몽테뉴, 프로스트의 작품과 암 환자들의 회고록을 읽으며 삶과 죽음을 곱씹는다.
두려운 현실 앞에선 절망하고 눈물도 흘린다. 그럼에도 밝은 면을 보려 했다. 손가락 끝이 갈라져 극심한 통증을 겪으면서도 글을 썼다. 딸 케이디와 8개월을 보낸 그는 딸에게 이 말을 남긴다. “(너는) 아빠가 평생 느껴보지 못한 기쁨이었고, 그로 인해 아빠는 이제 더 많은 것을 바라지 않고 만족하며 편히 쉴 수 있게 되었단다. 지금 이 순간, 그건 내게 정말로 엄청난 일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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