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애나 엑스’에서 주인공 애나와 아리엘이 처음 서로를 만난 뒤 각자 집으로 돌아가 상대방을 소셜미디어로 탐색하는 모습. 글림컴퍼니 제공
미국 뉴욕에서 ‘애나 델비’라는 가짜 이름으로 독일 상속녀 행세를 하며 거액을 투자받았다가 결국 옥살이까지 했던 사기꾼 애나 소로킨(35). 실제 인물인 그를 모티프로 한 영국 웨스트엔드 초연작 ‘애나 엑스’가 국내에서 첫선을 보였다.
이 연극은 소로킨에서 영감을 얻은 주인공 ‘애나’와 가상의 스타트업 대표 ‘아리엘’의 이야기를 주축으로 한다. 아리엘은 유명인이나 화려한 외모를 가진 이들만 가입하는 프라이빗 데이트 매칭 앱을 만들어 거액의 투자를 받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사업을 “실현 가능하단 증거도 없는 허상”이라며 “그냥 인간 본성의 천박함뿐인 아이디어에 투자한 것”이라고 자조한다. 그러면서도 더 높은 곳을 향한 욕망은 가득하다. 그런 아리엘의 눈에 상류층 상속녀 애나는 완벽한 파트너. 애나는 자신을 사랑하는 아리엘을 보며 조금씩 가면을 벗으려는 듯 고민한다. 그러나 두 사람이 만든 허상은 끝내 파국에 이른다.
‘애나 엑스’에서 먼저 눈에 띄는 건 스마트폰 화면처럼 꾸민 무대다. 두 사람이 소셜미디어 등으로 주고받는 메시지가 영상으로 떠 연극 무대가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오가는 듯한 재미를 느낄 수 있다. 다만 메시지를 영어 원문 그대로 사용한 건 상당수 관객들이 불편함을 느낄 대목이다.
애나라는 여주인공에 돈이 넘쳐나는 실리콘밸리의 ‘될 때까지 속여라(fake it till you make it)’ 정신을 상징하는 인물 아리엘을 결합한 점도 흥미롭다. 극 중에서 애나는 데이미언 허스트, 제프 쿤스 같은 현대 미술가들을 자주 언급한다. 이 작가들의 ‘실체 없는 아이디어’가 미술 시장에서 큰 거품을 만들어 내는 현상은 두 캐릭터의 실존을 반영하는 듯하다.
극에선 여러 주변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모두 두 배우가 연기하는 2인극이다. 이야기 전개에 따라 역할이 수시로 바뀌어 두 배우는 애나와 아리엘일 땐 항상 같은 옷을 입는다. 스타트업 대표인 아리엘이야 스티브 잡스가 떠올라 그렇다 치지만, 거부 상속녀인 애나의 근사한 의상을 기대했다면 아쉬울 수 있다. 다만 설정상 사람들의 환상 속에선 화려하지만, 실체는 아무것도 없는 애나를 표현한 것이라 이해할 수 있다.
애나 역은 최연우 한지은 김도연, 아리엘 역은 이상엽 이현우 원태민이 맡았다. ‘클로저’, ‘올드 위키드 송’을 연출했던 김지호 연출 작품. 서울 강서구 LG아트센터 U+ 스테이지. 3월 16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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