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네가 초상화의 배경을 지운 이유 [영감 한 스푼]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1월 24일 10시 00분


에두아르 마네, ‘피리 부는 소년’ 1866년. 오르세미술관 소장품

여기 피리를 부는 소년이 서 있습니다.

소년의 눈동자는 정면을 응시하고, 오므린 입술은 그가 연주에 집중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피리를 따라 왼쪽으로 눈길을 돌리면 소년의 손가락 하나가 올라와 있고, 수직으로 올라간 시선은 그 아래 금관 악기로 이어집니다. 이 흐름을 소년이 두르고 있는 흰 띠가 부드럽게 감아올리죠.

이 그림에서 이렇게 위아래로 움직이는 흐름을 만드는 요소는 더 있습니다.

소년이 입고 있는 재킷의 나란히 달린 금장 단추, 모자의 장식이 만드는 V 모양, 바지의 옆단에 붙은 검은 천, 그리고 마지막으로 앞으로 살짝 내민 왼발이 있죠.

이 왼발이 그림 모서리로 향하며 마치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생동감을 줍니다.

공중에 떠 있는 사람
이 작품은 인상파 화가들의 ‘정신적 지주’였던 에두아르 마네가 1866년 그린 ‘피리 부는 소년’.

1914년부터 1947년까지 루브르 박물관에 걸려 있다가 1986년 오르세 미술관의 소장품이 된 마네의 대표작 중 하나죠.

이 그림에서 생동감을 만드는 여러 가지 요소 중 가장 중요한 것을 아직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소년을 감싸고 있는 텅 빈 배경입니다.

다른 19세기 그림들이 전시된 곳에서 이 그림을 보면 단번에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다른 작품 대부분은 여러 인물이 등장하거나, 도시나 자연의 배경이 복잡하게 놓여 있는데 이 그림은 사람 1명만 강조해 그렸기 때문입니다.

다른 작품들은 1명을 모델로 초상화를 그리더라도, 의뢰를 받아 그린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그 사람이 살고 있는 공간, 또는 그 사람이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넣고 싶은 오브제들이 그림의 배경을 채웁니다.

마네의 다른 작품에서도 이런 구성은 흔히 드러납니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마네는 ‘배경을 채우고 싶은 욕심’을 과감하게 버리고 노란빛이 도는 회색으로 가득 채워버렸습니다.

심지어 바닥과 벽의 경계마저 지워버려 소년이 어디에 서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을 정도죠. 사진과 그래픽 기술 활용이 손쉬워진 지금에는 이렇게 인물만 잘라서 단색 배경에 놓은 다음 강조하는 디자인을 사용하는 것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작품은 마네가 무언가를 선전하기 위한 디자인이 아니라, 살롱전에 출품해서 새로운 예술적 시도를 보여주기 위해 공들여 그린 것이라는 점이 다릅니다.

에두아르 마네, 풀밭 위의 점심 식사, 1863년. 오르세미술관 소장

마네는 여기서 무엇을 보여주려고 한 걸까. 이 그림을 그리기 3년 전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 식사’를 공개했고, 여기서 붓 터치가 거칠고 구도가 이상하다는 지금의 시각에서는 말이 되지 않는 비판을 받습니다.

이에 상심해서 스페인 마드리드로 떠나는데요. 여기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습니다.

벨라스케스를 만나다
“벨라스케스가 그린 작품 옆에 전시되니 티치아노가 그린 초상화도 경직되고 생기가 없어 보이는군.”

마네가 마드리드에서 프라도 미술관을 보고 난 뒤 친구 화가 팡탱 라투르에게 보낸 편지에 등장하는 내용입니다.

마네는 이뿐 아니라 “벨라스케스를 본 것만으로도 여행한 보람이 있었다”, “벨라스케스는 화가들의 화가”라고 극찬하죠. 그러면서 ‘피리 부는 소년’처럼 배경을 삭제하고 그린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인물화에 감탄합니다.

디에고 벨라스케스, “Pablillos” de Valladolid(필립 4세 때 유명 배우/광대)의 초상, 1635년경. 프라도미술관 소장품.
디에고 벨라스케스, “Pablillos” de Valladolid(필립 4세 때 유명 배우/광대)의 초상, 1635년경. 프라도미술관 소장품.

“(그림에서) 배경은 사라지고 강렬한 검은 옷의 사람의 주변엔 오로지 공기만이 둘러싸고 있었다.”

사람의 주변에 공기밖에 없었다는 표현은 공중에 떠 있는 것 같다는 의미로 해석됩니다.

이렇게 인물을 극도로 강조할 수 있는 벨라스케스의 기법을 마네는 곧바로 자신만의 방식으로 해석합니다.

이뿐 아니라 벨라스케스가 초상의 대상으로 누구를 택했는가에 대해서도 그는 유심히 관찰하는데요. 마네는 벨라스케스가 그린 난쟁이 초상화 연작이 특히 마음에 들었다고 쓰기도 했습니다.

디에고 벨라스케스, 세바스티안 데 모라의 초상, 1644년경. 프라도미술관 소장품.
디에고 벨라스케스, 세바스티안 데 모라의 초상, 1644년경. 프라도미술관 소장품.


“난쟁이 초상화 연작들. 특히 정면을 바라보고 주먹을 양옆으로 내리고 있는 초상화 작품은 진짜 그림을 감상할 줄 아는 사람을 위해 만든 수작이야.”

정리하면 마네는 배경을 삭제한 인물화, 또 난쟁이를 모델로 한 인물화에서 감명받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마네의 눈에 왜 그렇게 신선하게 보였을까. 19세기 프랑스 미술은 원근법과 해부학을 토대로 한 이탈리아 하이 르네상스 회화를 추종하는 ‘신고전주의’가 주류로 인정받고 있었습니다.

이와 달리 스페인 미술은 벨라스케스, 프란시스코 고야 같은 거장들이 등장해 ‘아카데미 미술’에서 다소 벗어나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역사화나 종교화에 녹였고, 고야는 심지어 당시 스페인의 전쟁 같은 정치적 상황이나 인간의 내면까지 파고듭니다.

따라서 배경을 삭제한 인물화는 ‘사람 그 자체’를, 게다가 난쟁이를 모델로 한 인물화는 ‘아웃사이더’를 주인공으로 내세우니 마네가 깜짝 놀란 것이었습니다.

에밀 졸라의 옹호
마네는 벨라스케스처럼 평범한 사람을 배경 없는 초상화로 그리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 나폴레옹 3세 근위대 군악대에 소속된 10대 소년을 모델로 세웠고, 마네는 이 소년을 “스페인의 귀족처럼 대접”했습니다.

이 소년의 얼굴과 자신이 자주 함께 일했던 모델들의 얼굴을 합해 마네는 익명의 인물을 만들어냅니다.

그 결과 국가를 통치하는 왕도, 돈이 많은 귀족도 아닌, 역사 속에서 영웅으로 대접받는 인물도 아닌, 그저 피리를 부는 이름 모를 소년이 커다랗게 강조된 초상화가 탄생합니다.

마네는 이 작품을 1866년 살롱전에 보냈지만, 역시나 아카데미 회원들은 이 그림을 거절했습니다. 역사화나 영웅 초상화를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아카데미에겐 도발 같은 주제였으니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마네는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거절 소식을 듣고 화가 난 마네의 친구이자 문학가, 에밀 졸라는 마네의 사실적인 그림 스타일, 그리고 권위가 아니라 인물에 집중하는 모던한 그림의 내용이 얼마나 훌륭한 것인지 옹호하는 글을 신문 연재 기사로 내보냈죠.

마네도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개인적으로 자금을 모아 그 해 열린 만국박람회에 부스를 차리고 자기 작품을 전시했습니다.

독특한 스타일의 회화는 곧바로 미디어의 주목을 받습니다. 대부분 부정적인 것이었지만 역시 눈 밝은 사람들은 이 그림에 바로 호기심을 가졌습니다.

1872년 뒤랑 뤼엘이 이 그림을 사들였고, 마네의 친구인 장 바티스트 포르, 다시 뒤랑 뤼엘, 그리고 아이작 드 카몽도 공작이 이 그림을 소장했습니다. 그리고 카몽도 공작이 세상을 떠날 때 국가에 기증하며 이 작품은 루브르와 오르세에서 전 세계 관객에게 사랑받는 작품이 되었습니다.

※ ‘영감 한 스푼’은 예술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창의성의 사례를 중심으로 미술계 전반의 소식을 소개하는 뉴스레터입니다. 매주 목요일 아침 7시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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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두아르 마네#인상파#벨라스케스#피리 부는 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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