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담배 안하고 OO 샀다…신문선의 ‘인생 연장전’ 밝혀준 이것은[이헌재의 인생홈런]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4월 29일 12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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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 축구해설가이자 와우갤러리 명예관장을 맡고 있는 신문선 씨가 권순철 화백이 그려준 자신의 얼굴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했다. 이헌재 기자 uni@donga.com

“골, 골, 골이에요~” 우렁찬 저음과 다양한 명언으로 한국 축구 해설계의 한 획을 그은 축구 해설가 신문선 씨(66). 그는 서울체고 시절 전국대회에서 3차례나 팀을 우승으로 이끈 엘리트 축구선수 출신이다. 연세대에 진학한 후엔 국가대표로 발탁됐고, 1983년 출범한 한국프로축구 유공 코끼리에 입단해 프로 선수 생활도 했다. 그는 K-리그 제1호 어시스트 기록 보유자이기도 하다.

신문선의 연세대 재학 시절 경기 모습. 신문선 제공

3년간 프로 선수 생활을 한 뒤 그는 미련 없이 유니폼을 벗었다. 연대 교육대학원에 입학해 학업을 이어가기 위해서였다. 몇 년 후 그는 프로스펙스 운동화를 만들던 국제상사에 입사해 홍보와 마케팅 업무도 맡았다.

축구 해설을 하게 된 건 1986년 멕시코 월드컵을 앞두고서였다. 당시만 해도 국내엔 해외 축구를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았고, 국제대회 해설을 할 인력도 거의 없었다. 축구선수 출신에 대학원까지 다니던 그는 아르바이트 삼아 한 방송국에 월드컵 퀴즈 문제를 내고 있다가 갑자기 중계석에 앉게 됐다. 그는 “당시 한 경기 중계당 4000원짜리 바우처 한 장을 받았다. 바우처가 쌓이면 방송국 경리 창구에 가서 현금으로 바꾸곤 했다. 지금으로선 상상하기도 힘든 일”이라며 웃었다.

캐스터 송재익-해설가 신문선 콤비는 재미있고 명쾌한 축구 중계로 큰 인기를 끌었다. 동아일보 DB
캐스터 송재익-해설가 신문선 콤비는 재미있고 명쾌한 축구 중계로 큰 인기를 끌었다. 동아일보 DB

이후 10여 년 간 그는 세상 누구보다 바쁘게 살았다. 송재익 캐스터와 호흡을 맞춘 축구 해설은 엄청난 인기를 얻었다. 1990년대 후반 그는 축구 해설가로는 사상 처음으로 연봉 1억 원 시대를 열었다.

국제상사에서도 승승장구했다. 사원, 대리, 과장대우, 과장, 차장을 거쳐 홍보와 마케팅 업무를 책임지는 부장이 됐다. 입사 10여년 만에 그가 관리하는 직원만 200명이 넘었다. 그는 없는 시간을 쪼개 모교인 연세대에서 축구 실기와 이론 강의도 했다. 한 스포츠신문과 종합지에는 칼럼도 연재했다. 그는 “하루 세 시간씩 자면서 일을 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중계를 펑크 내거나 칼럼 마감 시간을 어긴 적이 없다. 회사 일도 누구보다 열심히 해 승진이 빨랐다”고 했다.

축구선수와 해설가가 그의 인생 전반전이었다면 인생 후반전엔 어릴 때부터 꿈꾸던 교단에 섰다. 2006년 독일 월드컵 32강 본선 조별리그 한국과 스위스전에서 벌어진 ‘오프사이드 논란’ 이후 그는 해설자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그는 이듬해인 2007년 명지대 기록정보과학전문대학원 스포츠기록분석전공 교수에 임용돼 지난해까지 17년간 교수 생활을 했다. 그 사이 부정기적으로 축구 중계를 맡아 마이크 앞에 섰고, 2014년에는 성남FC 대표이사로 구단을 운영하기도 했다. 그는 “교편을 잡았을 땐 학생들을 나의 고객으로 생각했다”며 “지난해 정년퇴직하면서 가르치던 학생들에게 치약을 4개씩 선물했다. 말이 나오는 입을 항상 깨끗해 해야 한다는 의미였다”고 했다.

‘신문선 공간’을 채우고 있는 박영선 작가의 조각품을 설명하고 있는 신문선 와우갤러리 명예관장. 이헌재 기자

그는 요즘 ‘인생 3막’을 살고 있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인생 연장전”이다. 축구에서의 연장 승부 못지않게 그의 인생 연장전은 여전히 활력 넘치고 치열하다. 그에겐 어릴 때부터 사랑해온 그림이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 그는 예전에 살던 서울 마포구 상수동에 자신의 이름을 딴 ‘신문선 공간’을 만들었다. 그의 가족이 4년 전 서울 종로구 청운동으로 이사하기 전까지 18년 동안 살았던 지하 1층, 지상 3층의 단독주택을 개인용 미술관으로 꾸몄다. 일본 민예관(日本民芸館)과 태국의 짐 톰슨 하우스를 모델로 한 문화 예술 공간이다.

‘신문선 공간’에는 방마다, 그리고 복도마다 그가 수십 년간 모아온 그림과 조각들이 방문객을 반갑게 맞는다. ‘얼굴’ 작품이 많은 권순철 화백, 군중(群衆)을 그린 이상원 화백, 제주의 자연을 그린 변시지 화백, 서울대 미대 교수 출신의 서용선 화백 등의 작품이 많다. 고 구본무 LG 회장으로부터 선물 받았다는 김창열 화백의 물방울 그림도 한켠에 자리 잡고 있다. 그는 “지금은 개인적인 공간으로 운영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보다 많은 사람들이 즐길 수 있도록 대중에게 오픈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그는 스스로를 ‘그림 환자’라고 칭한다. 한창 축구 해설자로 일하던 시절 외국에 나가면 중계할 때를 빼곤 혼자 현지의 미술관과 박물관을 돌았다. 정말 마음이 드는 작품이 있으면 구매를 하기도 했다. 그는 “해설을 시작한 이후 그림을 사느라고 술, 담배를 전혀 하지 않았다”며 “외부 특강이나 강연이 잡혀 있으면 나중에 들어올 강연료를 계산해 외상으로 그림을 산 적도 있다”며 웃었다. 그렇게 한 점, 두 점 모은 그림들이 지금은 ‘신문선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다. 그는 “내게 그림은 일종의 부적과 같다. 그림들이 좋은 곳에 걸려 있으면 내게 무한히 좋은 에너지를 주는 것 같다”고 했다.

신문선 와우갤러리 명예관장이 권순철 화백이 그린 어머니의 얼굴 그림을 설명하고 있다. 이헌재 기자

그가 그림의 세계에 빠지게 된 건 대학 입학 직후다. 당시 연세대는 일본 게이오대와 자매결연을 맺어 1년에 한 번씩 교환 방문을 했다. 그는 일본 방문 경기 때 한 일본 친구의 집에 초대를 받았다. 신라시대 석탑과 조선시대 석등으로 정원을 꾸민 이 집에 들어서자마자 그는 큰 충격을 받았다. 거실에 놓인 조선시대 달항아리는 단숨에 그를 사로잡았다. 그날 이후 그는 미술과 문화의 세계에 푹 빠져 버렸다. 그가 난생 처음 구매한 그림은 대학생 때 일민미술관에 들러서 산 박영선 화백의 작품이었다.

젊은 시절 열심히 일한 덕분에 그는 2000년대 초반 마포구 홍익대 앞에 한 건물을 살 수 있었다. 그리고 2019년 그 건물에 ‘와우갤러리’를 오픈했다. 그는 “홍익대는 대한민국 최고의 미술대학 아닌가. 그런데 정작 홍대 앞에서 술집과 커피숍은 많지만 갤러리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었다”며 “그래서 일부러 그곳에 갤러리를 열었다. 이름 있는 작가 뿐 아니라 젊은 작가들도 초대해 전시회를 열곤 한다. 우리 갤러리를 통해 발전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거다. 그런 분들이 세계적인 작가로 커 간다면 내게도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이라고 말했다. 현재 그는 와우갤러리의 명예관장직을 맡고 있다.

신문선 와우갤러리 명예관장과 아내 이송우 씨가 인왕산 정상에 올라 셀카를 찍었다. 신문선 제공

그림을 보는 것과 함께 그가 요즘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아내 이송우 씨와 함께 인왕산 주변을 걷는 시간이다. 4년 전 종로구 청운동으로 이사온 후 그는 하루도 빼놓지 않고 인왕산 주변을 걷는다. 그는 “내게 운동은 밥이나 마찬가지다. 하루 만보는 기본으로 걷는다”며 “아내와 함께 걷는 시간이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고 말했다.

자주 다니는 길에는 ‘신문선 코스’라는 이름을 붙였다. 청운문학도서관을 출발해 이빨바위-가온다리-전망대-해맞이 동산-수성동 계곡-택견 수련터-황학정을 왕복하는 코스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어 1시간 40분 가량이 걸린다. 걸음 수로는 1만1000보 정도가 나온다. 경사가 완만해 아내 이 씨와 함께 걷곤 하는 인왕산 둘레길에는 ‘이송우 코스’란 명칭을 붙였다.

걷기를 좋아하는 부부는 제주 한라산의 숲길도 가끔 걷는다. 그는 “제주는 둘레길로 유명하지만 나무가 무성한 숲길이 제주의 미래라고 생각한다. 숲길은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도 그리 춥지 않아 사시사철 걷기에 좋다”고 말했다.

신문선 와우갤러리 명예관장과 아내, 두 아들이 태국의 박물관을 찾아 찍은 기념 사진. 신문선 제공

뼛속까지 축구인인 그는 지금도 여전히 축구를 한다. 지난해 자신의 이름을 딴 ‘신문선축구클럽’을 만들어 한 달에 2,3번 모여 함께 공을 찬다. 단장 겸 구단주를 맡고 있는 그는 다른 팀과의 경기를 잡고, 그라운드에서 땀을 흘린다.

그는 “축구인으로, 교수로, 또 미술과 차와 오디오를 좋아하는 사람으로 행복한 삶을 살아왔다. 남은 인생에도 한국 축구를 위해 봉사할 기회가 있으면 언제든 축구로 돌아갈 것”이라며 “당장은 ‘은퇴 해설’을 해보고 싶다. 내 해설을 좋아했던 분들에게 마지막으로 낭랑한 목소리를 들려드리고 싶다. 평생 모아온 그림을 통해서도 더 많은 분들께 즐거움을 드리고 싶은 마음”이라고 말했다.

이헌재 기자 un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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