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을 단죄한 걸까… 인간을 해친 걸까 [이호재의 띠지 풀고 책 수다]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2월 24일 01시 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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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년 전 작 ‘죄와 벌’ 변주한 듯
‘살인자ㅇ난감’ 주인공의 딜레마
◇죄와 벌(전 2권)/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지음·홍대화 옮김/각 권 408쪽·각 권 1만1800원·열린책들

이호재 기자
이호재 기자
넷플릭스 드라마 ‘살인자ㅇ난감’ 4화. 악인을 감별하는 능력을 우연히 발견하게 된 주인공 이탕(최우식)은 지경배 검사(남진복)를 살해하기 전 잠시 망설인다. 지 검사를 납치해 포박한 상태라 죽이기만 하면 되지만 복잡한 감정에 휩싸인 것이다. 이탕은 말없이 앉아 책 한 권을 읽는다. 책을 덮은 뒤 지경배에게 다가가 한숨을 쉬며 이렇게 묻는다. “제가 왜 아저씨를 죽이려는 걸까요?”

이탕이 읽는 책은 장편소설 ‘죄와 벌’이다. 러시아의 대문호 표도르 도스토옙스키(1821∼1881)가 1867년 출간했다. 최근 넷플릭스 비영어권 시리즈 부문 1위에 오르며 인기를 끌고 있는 ‘살인자ㅇ난감’이 다루는 주제가 157년 전 이미 다뤄져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이다. 두 작품 모두 묻는다. ‘악인을 죽이는 일은 용서받을 수 있는가.’

‘죄와 벌’에서 대학생 라스콜니코프는 악덕 고리대금업자인 노파를 도끼로 잔혹하게 살해한다. 자신이 선악을 초월한 비범한 인물이라는 점을 증명하기 위해서다. 라스콜니코프는 노파의 재산 대부분은 그대로 둔 채 자신의 방으로 돌아간다. 운 좋게도 라스콜니코프의 범행은 걸리지 않는다.

‘살인자ㅇ난감’에서 ‘죄와 벌’이 등장하는 장면은 많지 않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죄와 벌’은 원작에 가까울 정도로 영향을 끼쳤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죄와 벌’의 배경인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당시 경제적으로 급격하게 발달하면서 빈부격차가 극심했다. 가난한 라스콜니코프가 부자인 노파에게 혐오의 눈빛을 보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살인자ㅇ난감’에서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살던 이탕, 고급 승용차를 타고 회식 비용을 거리낌 없이 결제하는 지 검사에게도 삶의 격차가 엿보인다.

합리화 과정도 비슷하다. ‘죄와 벌’에서 라스콜니코프는 “사악한 노파의 삶이 얼마만큼의 가치를 지닐 수 있을까”라며 피해자를 깎아내린다. “‘비범한’ 사람은 양심상 장애를 제거할 수 있다”며 가해자인 자신을 옹호한다. ‘살인자ㅇ난감’에서 이탕의 조력자인 ‘노빈’(김요한)이 “쓰레기통(이탕)이 있어야 쓰레기(악인)를 버릴(죽일) 수 있다”고 말하는 것과 유사하다.

‘죄와 벌’에서 라스콜니코프는 죄책감을 극복하지 못한다. 우연히 범죄 현장을 발견한 노파의 이복 여동생까지 죽인 건 자신이 완전범죄를 위해 저지른 잘못이기 때문이다. 또 자신은 사람을 죽이고 평온할 수 없는 평범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자수한다. ‘살인자ㅇ난감’에서 이탕이 매일 밤 자신이 죽인 이들의 환영을 보는 점과 데칼코마니처럼 겹친다.

‘살인자ㅇ난감’ 4화 마지막 부분에서 이탕과 노빈은 함께 지 검사를 살해한다. 행동만 봐선 둘 다 용서받을 수 없다. 다만 악인은 죽여야 한다고 확신하는 노빈과 ‘죄와 벌’을 읽으며 망설이던 이탕의 반응은 조금 다르다. 노빈은 “(함께 우리) 집으로 가자”고 제안하지만 이탕은 “따로 살고 싶다”며 거절한다. 용서받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는지, 강물에 떠내려가는 지 검사의 시체를 바라보는 이탕의 표정은 어쩐지 슬퍼 보인다.


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죄와 벌#살인자ㅇ난감#딜레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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