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하지 않기에 우리와 닮아있는[정보라의 이 책 환상적이야]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10월 28일 01시 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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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자-비주류 아우르는 SF 영웅
완벽하지 않아 더 감동적일지도
◇0과 1의 계절/최의택 지음/385쪽·1만6800원·요다

미국 영문학자 엘리스 헬퍼드는 서양 문학의 모든 이야기는 “인간, 역사, 진실”이라는 세 개의 키워드로 요약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인간이 역사 속에서 진실을 발견하는 이야기, 혹은 인간이 진실을 찾는 과정에서 역사를 만드는 이야기, 이런 것이 서양 문학의 본원적인 서사구조라는 것이다.

이것은 성장소설의 특성과도 상통한다. 성장소설도 문학 장르의 한 분야이므로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다. 성장소설에서 주인공은 언제나 익숙했던 환경을 떠나 낯선 시공간을 탐험하고 새로운 세계를 만나고 그 과정에서 자신이 존재하는 세계에 대한 진실을 발견하며 성장한다.

정보라 소설가
정보라 소설가
장편소설 ‘0과 1의 계절’이 이런 특성을 가진다. 멸망한 지구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아날로그 인류’와 ‘디지털 인류’로 나뉘어 존재한다. 디지털 인류는 가상현실 바깥 세계에 대해 알지 못한다. 아날로그 인간을 마주했을 때 디지털 인류인 ‘현’은 가상현실 안에서 감지되거나 인식되지 않는데 물리적으로 기척을 느낄 수 있는 존재를 처음 대하고 ‘유령’이라고 생각한다.

한편 아날로그 인류인 ‘봄’은 디지털 인류가 살아가는 곳이 악마가 인간의 어린이를 붙잡아 희생물로 바치기 위해 사용하는 사육장이란 신화적인 설명을 믿으며 성장했다. 주인공들의 지적 탐색, 정서적인 유대감, 정신적 성장은 서사구조와 유기적으로 연결된다. 독자는 주인공 현, 봄과 함께 작품 안의 세계를 탐색하고 그 구조를 천천히 발견한다. 영국 작가 조지 오웰의 소설 ‘1984’, 영국 작가 올더스 헉슬리의 소설 ‘멋진 신세계’도 이와 유사한 서사구조를 지녔다. ‘0과 1의 계절’은 주인공들이 좀 더 어리고 발랄할 뿐, 작품 전체의 구조와 특성에 있어서 고전적인 유토피아, 디스토피아의 전통을 따르는 셈이다.

헬퍼드가 서양 문학의 서사구조를 설명한 이유는 서양 문학 2000년의 역사에서 주인공인 ‘인간’이 거의 언제나 예외 없이 비장애인 백인 성인 남성이었음을 지적하기 위해서였다.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영웅’(hero)라는 단어의 본래 뜻은 ‘본받을 만한 인물, 역할 모델’이다. 영웅은 지식과 경험뿐 아니라 신체적인 능력 또한 평균보다 뛰어난 사람만을 의미했으며 그런 사람만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시대가 아주 길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공상과학(SF)은 비장애인 중심, 백인 남성 중심, 나아가 인간 중심주의의 틀을 깨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헬퍼드는 미국 유색인 SF 작가 새뮤얼 딜레이니의 말을 빌려 SF가 소수자의 관점을 표현하기에 가장 좋은 장르임을 강조한다.

최의택은 장애인 청소년들을 주인공으로 삼는다. 현과 봄은 처음부터 민족의 운명을 책임지지도 않았고 뭇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능력을 가진 적도 없다. 고전적인 영웅과는 정반대되는 인물들이기 때문에 현과 봄은 더 목마르고 더 자유롭다. 불완전한 주인공이 그렇게 성장해서 ‘영웅’이 되는 이야기야말로 평범한 현대의 독자들이 가장 공감할 수 있는 영웅담일 것이다.


정보라 소설가
#소수자#비주류#sf 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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