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 마라톤 정신이냐’고? 영화와 달리 서윤복은 성조기를 달고 뛰었다[후일담]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9월 28일 10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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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1947 보스톤’ 한 장면.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서윤복 선생(1923~2017)이 제51회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서 우승하는 과정을 담은 영화 ‘1947 보스톤’이 27일 개봉했다.

이 영화에서 손기정(하정우 분), 남승룡(배성우 분), 서윤복(임시완 분)은 미국 보스턴에 도착해 러닝 복을 받은 뒤 분노한다.

태극기 대신 성조기(미국 국기)가 큼지막하게 들어 있는 옷이었기 때문이다.

영화 ‘1947 보스톤’ 한 장면.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손기정은 기자회견을 열고 이렇게 말하면서 대회 출전을 보이콧하겠다는 뜻을 밝힌다.

“저희는 조선의 독립을 알리려 이곳에 왔습니다. 하지만 조선의 국기가 아닌 성조기가 달린 유니폼을 받았습니다.

그 유니폼을 입고 뛰라는 것이 여러분이 말하는 보스턴의 독립 정신이며 죽을힘을 다해 달려 승전보를 전하는 마라톤 정신이라면 저희는 이곳에 잘못 왔습니다.“

결론은 물론 해피엔딩이다. 서윤복은 앞가슴에 태극기를 달고 달린다.

영화 ‘1947 보스톤’ 한 장면.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원하시는 부사를 넣으시오) 역사적 사실은 조금 달랐다.

실제로 서 선생은 성조기와 태극기가 나란히 붙어 있는 옷을 입고 달렸다.

당시는 아직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전인 미군정 시절이었기 때문에 이게 아주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대신 가슴 한복판에 ‘KOREA’라고 써넣어 조선의 독립을 알렸다.

사진 출처 보스턴 마라톤 소셜미디어
이 영화만 ‘성조기 말소 사건’에 앞장선 게 아니다.

대한육상연맹에서 2013년 펴낸 ‘한국육상경기 100년사’에는 서 선생이 당시 세계 최고 기록(2시간25분39초)으로 결승선을 통과하는 사진이 들어 있다.

이 사진에서도 성조기 문장(紋章)을 찾기가 쉽지 않다.

얼핏 보면 정말 태극기만 달고 달린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진 출처 ‘한국육상 경기 100년’
사진 출처 ‘한국육상 경기 100년’
그러나 원본 사진을 찾아보면 성조기 부분에 ‘터치’가 있었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누가 어떤 의도로 손을 댔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니면 그 부분만 우연히 사라졌을 수도 있지만 다른 부분과 눈에 띌 정도로 차이가 난다.

물론 내기를 하라면 누군가 성조기를 지우고 싶어서 일부러 손을 댔다는 데 베팅하는 게 옳은 일일 확률이 높다.

대한체육회 제공
대한체육회 제공
그렇다고 ‘1947 보스톤‘이 고증에 완전히 실패한 건 아니다.

서 선생은 시상식 때는 태극기만 있는 옷을 입고 월계관을 썼다.

1897년 시작한 보스턴 마라톤에서 아시아 선수가 우승한 건 서 선생이 처음이었다.

대한체육회 제공
대한체육회 제공
이 영화를 연출한 강제규 감독은 ‘국뽕’ 때문에 비판받은 일이 적지 않았던 게 사실.

그러나 러시아 시인 니콜라이 네크라소프(1921~1878)는 “슬픔도 노여움도 없이 살아가는 자는 조국을 사랑하지 않고 있다”고 썼다.

일장기 말소 사건 주인공 이길용 동아일보 기자(1899~?)처럼 조국을 사랑하는 누군가 슬픔과 노여움으로 ‘성조기 말소 사건’도 일으키지 않았을까.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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